상주개인택시 김상준 기사

택시운전을 하시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도 지금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그 사연은 크고도 깊다.

1950년 아주 더운 날 나는 경북 상주시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까지는 무난히 졸업했다.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 아버지께서는 7인승 차량인 ‘윌리스 웨건’을 몰며 택시 사업을 하고 계셨다.

2차대전에서 쓰였다는 이 차는 당시 상주에서는 단 한 대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차는 동네 결혼식 대절차량으로 쓰이기도 했다. 차를 몰고 식장으로 가면 신랑 신부는 뒷전이고 차를 구경하기 위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이기도 했다.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지금도 흔히 볼 수 없는 차라 당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집안의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남다른 호기심을 품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쉽게 운전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지는 못했다. 2대째 택시 가업을 잇기는 어려운 데다 어머니께서 강경히 반대하셨기 때문이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예비고사를 거부했다. 오직 운전만 바라보다 3년간 군 복무를 마쳤고 1974년도 초가을, 기회가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건강이 나빠져 운전대에서 손을 놓으셨다. 8명의 식구를 먹여 살릴 사람은 당시 총각이었던 나뿐이었다. 나는 누가 반대할 틈도 없이 가업인 택시를 이어받았다. 아버지께서는 건강이 점점 악화되셨고 나는 1년간 조수(현재 견습생)로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면허를 취득하고 택시업에 대한 것을 교육을 받으셨는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선친의 운전에 대한 조언으로는 첫째, ‘절대 건방진 운전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필요 없는 속력과 사람 앞에서 뽐내는 운전을 하지 말고, 운전대 앞에서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둘째는 ‘기계는 절대 거짓이 없다’이다. 수많은 기계장치의 하모니로 운행이 되는 자동차는 운전자의 습관이나 관리에 따라 차량의 상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3개월과 3년을 조심하라’이다.

말 그대로 3개월과 3년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는데 첫 3개월을 잘하게 되면 어리석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3년째에는 자신이 베테랑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돼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이후 매일 선친의 조언을 항상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업무를 시작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간 조수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나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운전을 잘 한다는 말도 듣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돌아가시기 직전 고향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지막이 “이제 너에게 운전대를 맡겨도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여러 번 농촌을 떠나서 여타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종가집 장남으로서 책임감과 식구들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것도 한때는 큰 걸림돌이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그간 무수히 크고 작은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곤 한다.

지금은 열심히 노력한 덕에 형제자녀들을 어렵지 않게 시집 장가를 보냈다. 그러고 나니 이제는 내 자녀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내 나름대로 회한을 돌이켜 볼 때는 혼자서 미소를 지어보기도 하고, 조금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그렇게 긴 기간 택시를 운영하다 5년 전 그간의 노력으로 개인택시 모범기사로 채택이 돼 5박6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두루 관광했다.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세계적인 굴지의 일본 MK택시였다. 혼자서 묻어두기에는 너무도 아쉽고 해서 상주지역에서 발행하는 권위 있는 신문에 MK택시만의 성공 신화를 택시기사 뿐 아니라 상주시민들에게까지 홍보의 역할을 톡톡히 해서 많은 이에게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 이후 MK택시에 대한 것을 신문에 기고한 것을 어떻게 MK택시 유봉식 회장이 알게 됐는지 몰라도 대구에 특별 강의차 오셨을 때 나의 처와 함께 초청을 하셨다.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이런 것까지 기억을 해서 나에게 인사까지 하는 것을 보면 친절 택시의 표본이자 성공신화의 MK택시 회장다운 행동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나의 처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생각해 보면 지난 40년간 택시기사를 해 오면서 거의 한 번도 빠짐없이 식사를 집에 와서 했었는데 식사를 가정에서 하는 것 자체를 집에 대한 애정이자 소통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의 처가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묵묵히 따뜻한 식사준비를 해주고 두 아들까지 잘 키워 준 것을 보니 나의 택시업의 기반은 내 처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2대에 걸친 택시 운전자로 지금은 개인택시의 공익 사업자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고, 또 2대에 걸쳐 선친께서 6·25 사변 국가 유공자, 나는 월남의 안케패스 작전에 참가한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아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는 유공증서를 볼 때마다 나만의 성취감과 만족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것처럼 나는 내 업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티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