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자야

일 년에 한 번씩 출가한 우리 형제들은 친정집으로 모인다. 그리고는 모쪼록 마음을 터놓고 하루를 보낸다. 평소 나에게 살갑게 구는 제부(弟夫)가 일부러 구리에서 집까지 차를 몰고 왔다. 나는 동생내외와 함께 한 차에 남편과 같이 동승을 했다. 일요일이었다. 그날따라 그렇게 차가 밀렸다. 중간 중간 휴게소에서 쉬어가길 몇 번….

차는 자정이 넘어서야 노모가 계신 합천 골짝에 이르렀다. 무너질 듯한 철대문 앞에 노모가 플래시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이렇게 늦었노? 중간에 뭔 일은 없었제?”
엄마는 근심에 싸인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앗다, 장모님도. 있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찬바람 쐬지 말고 들어가십시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안 가운데 형광등 하나가 휑뎅그레 매달려 있다. 그 뿌연 불빛 아래서 엄마는 밤늦게까지 우리 일행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사위가 올리는 큰절도 마다하고 부엌부터 들어가신다. 내가 엄마를 말렸다.

“아이다. 너거 줄라꼬 묵 좀 맹글어놨다.”
“엄마? 우리 야참 먹고 왔어요.”
“그래도 입에 뭐 좀 넣어야지.”

엄마는 부득부득 고집을 부린다. 나는 그런 노모의 정을 뿌리칠 수가 없다. 작은 소반 위에 엄마가 장만한 음식과 술병이 올려 진다. 내가 얼른 술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넉살 좋은 제부가 허허거리며 잔을 돌린다. 밤늦은 시간에 우리는 술이 취할 때까지 술잔을 돌렸다. 그때까지 엄마는 그 뿌연 불빛을 안고 방안 한 구석에 앉아 흐뭇한 눈으로 우리를 살피고 앉았다.

이제 밤이 늦었다. 남편과 제부는 건넌방으로 가고 나와 동생은 엄마 방에 함께 누웠다. 내가 전등을 끄면서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종일 우리 기다린다고 욕봤죠?”
“앙이다. 기다리는 것이 우째 오늘 뿐이가. 핑생을 기다려왔는디….”

엄마가 어둠 속에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평생을 기다리며 살아온 우리 엄마였다. 어렸을 땐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고 꽃다운 나이 스물에 이르자 등 너머 숫총각 울 아빠한테 시집을 왔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 온 우리 엄마는 낮에는 밭에 나가 밭고랑을 매고 밤이면 잠을 잊고 길쌈을 했다.

그러면서 부자가 되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한 인텔리였다. 그 위에 알아주는 젠틀맨이었다. 늘 부부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떠돌았다. 그런 아빠는 수시로 바람을 피우며 읍내를 들락거렸다. 읍내기생집에 눌러 사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엄마는 눈시울이 짓무를 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빠가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런 기다림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늦바람이 잠재워지는가 하더니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엄마는 하나 있는 아들이 출세가도를 달리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딸자식들도 힘자라는데 까지 공부를 시키며 그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기다리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나는 그런 엄마의 기다림에 이날 입때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록 남의 문전에 손을 내밀 처지는 면했지만 내 앞치레도 바쁜 나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 공부 시키랴. 다 큰 딸자식 시집보내랴, 내 앞에 널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엄마는 주야장청 걱정이다. 저 애가 잘 살아야할 텐데…. 죽기 전에 잘 사는 거 내 눈으로 보고가야지.

엄마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사는 인생. 그게 어찌 울 엄마뿐이랴. 나도 기다림 속에 이날까지 살아왔다. 어릴 땐 공부 잘해서 우등생이 되기를 기다렸고, 처녀 적엔 백마 탄 남편감이 홀연히 내 눈앞에 나타나길 기다렸다.

자식을 낳자 그 애들이 얼른 자라서 어른이 되길 기다렸고 아침저녁 마주하는 남편을 보면서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다렸다. 좋은 글 하나를 남기려고 여태 노심초사해왔고 내 이름 석 자가 남의 입에 오르내려 유명세 타기를 기다려왔다.

그러나 기다림은 쉽게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다. 앞산 자락에 걸린 무지개 같았다. 금방 손에 잡힐 듯한 무지개는 다가가면 갈수록 잡힐 듯 잡힐 듯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어느새 옆자리에 누운 엄마가 잠에 빠진 숨소리가 들린다. 가르릉 거리는 목소리가 언젠가 들었던 앞집 고양이 소리 같다.

불현듯 잠 든 엄마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소리 없이 일어나 방문 앞의 스위치를 올렸다. 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 몸을 옹크리고 잠이 든 엄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엄마는 평안해보였다. 잠시나마 기다림에서 풀려난 모습이 참으로 아늑해 보였다.

기다림에서 풀려난 엄마의 모습을…. 나는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가슴이 벅차 또 다시 벽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둠 속이었다. 잠든 엄마의 소리를 들으며 불현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도 모르게 참았던 가슴 속 울음소리가 미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를 죽이려고 애를 썼다. 소리 죽여 우는 내 울음소리에 잠 든 엄마가 어느새 깨어났다.

“자야? 니 어데 아프나?”
“앙이다, 엄마. 그냥 자요, 엄마.”
“울지 마래이.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이데이. 아아들 걱정 마라. 시월이 약이데이. 시월가면 다 해결된다. 그러니 자거라, 고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세월이 약이지. 저 엄마 말처럼….그래, 잊자. 나도 잠시 그 긴 기다림에서 벗어나자. 그러다가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작가 이자야

수필가, 시인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월간 수필문학 편집국장
수필집 ‘그는 늘 색안경을 쓰고 다닌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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