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한 작가

“집구석이 이게 뭐니”라는 시어머님의 날 선 채근에 집 칸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건너 방 컴퓨터 책상으로 건너와 앉아있는 당신의 모습이 사뭇 귀엽다. 사래라도 걸렸는지 잦은 헛기침에 안쓰럽기도 하지만 자리 고쳐 잡고 책상 앞에 앉은 매무새가 눈에 곱다.

휴일 날 아침부터 가족들의 식사를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 눈길을 내게 돌려 구원을 청할 때면 그 눈길을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어차피 하릴없이 앉아있던 터라 부단히 일어나 부엌 도마 앞에 선다. 오늘은 샌드위치에 감자 범벅이 주된 메뉴라고 하니 그나마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건 빵 굽기가 제격일 듯싶다. 선반 위의 식빵 하나를 꺼내어 겉부터 안까지 골고루 버터를 발라준다.

이 작업은 쉬운 듯이 보여도 막상 손길을 잘못하면 손에 묻히기가 십상이다. 정성스레 조심조심 구석까지 빈틈없이 채워 주어야 제 맛이 우러난다. 이 부분은 아내가 늘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전기 토스트기에 잘 재워진 식빵을 넣고 스위치만 내려주면 그 뿐인 이 작업을 아내는 곧잘 내게 부탁을 하곤 한다. 어느새 익숙히 배어버린 남편 의탁증이 아닐까 싶다.

곁에서 자박자박 야채 씻김을 하던 손을 문득 멈추며 아내가 말을 걸어온다. 어제 다녀간 아들 녀석의 뒷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군 입대보다는 일정이 빠른 의무경찰을 지원해 작년 9월에 입대한 아들은 아내에게는 친구와 같다. 매주 외출을 나오는 터라 조금은 천덕꾸러기가 된 아들이건만, 자기 엄마에게는 사뭇 여러 가지 속내를 털어 놓는 듯 하다.

기실 뒤늦은 전경복무에 고생이 있을 법도 한데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는 것 같아 나 역시 마음 한켠으로 대견한 생각이 든다. 아마도 주중에 훈련을 마치고 잠시 집에 다녀갈 것이라는 간단한 전언이건만, 마음을 전해주는 살뜰함에 아내가 즐거웠던 모양이다. 탁 소리와 함께 알맞게 익은 토스트가 올라온다. 향긋한 버터 내음과 약간 바삭한 느낌의 거칠감이 손끝에 전해온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영양을 고려하여 햄이랑 산적, 치즈 마지막으로 갓 씻어낸 야채까지 듬뿍 넣었건만 두 분의 입맛에는 영 아니신 것 같다. 아무 말씀 없이 시원한 물김치만 연신 드시는 것이 아무래도 재료를 과하게 쓴 탓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아내는 내 편이다. 두말없이 주어진 네 조각을 다 먹고, 어머님이 남기신 한 쪽까지 손에 들어준다.

속이 좀 거북하시다던 아버님이 그런 아내를 보고 한 말씀하신다. “네 처는 잘도 먹는구나”하며……. 아마도 비위에 맞지 않으신 터라 조금 더 먹는 아내의 모습이 사뭇 신기하신 모양이시다. 부모님이 물러 앉으신 뒤에 식탁을 함께 챙기며 아내에게 말을 건넨다. 저녁에 있을 모임을 가기 위해선 소박한 점심이 필요할 터인지라 간단한 냉 우뭇가사리가 어떤지 하고, 아내 역시 동의하는 눈치이지만 두 분의 식사가 영 시원치 않으신 건 아닌지 슬쩍 염려가 되는 눈치이다.

부모님께 여쭈어보니 두 분 다 흔쾌히 동의를 해 주신다. 아침 참은 좀 시원치 않았어도 정성이 담긴 터라 속은 든든하시단다. 대충 뒷정리를 아내에게 맡기고, 서재에 물러나와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20년 유배지에서 만난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모처럼 교보 문고에 나갔다가 사 들고 들어온 책이다.

‘삶을 바꾼 만남’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 사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어 든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어느새 아내와 함께한 25년의 세월, 돌이켜보면 어제 일처럼 새롭기만 하다. 머리에 내려앉은 흰 서리가 드문드문 눈에 뜨이지만 아직도 수줍움이 많은 아내는 다소곳이 한켠에 자리한 국화와 같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기나긴 무서리를 견디고 기품을 은은히 풍겨내는 노란 국화와 같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시 부모님과의 25년에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아내지만, 스물 다섯 해 전 다소곳이 내 앞에 앉아 한치 소면을 뒤적이던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앉아있다.

 

 

/작가 이인한

중앙대 교육대학원 졸업
(주)효성 근무중
순수문학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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