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개인택시 류근웅 기사

서울개인택시 류근웅 기사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다. 나는 어려운 시절을 지내고 산전수전을 다 겪다가 지금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개인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다.

충남 공주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 큰아버지께서 살고 계셨는데 어느 날 공주에 내려오셔서 나에게 ‘서울에서 기술을 배워야 산다’고 조언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서울에 올라갔다. 아기를 봐주고 밥도 날라주고 하며 온갖 잡일을 다 하면서 산 지 얼마 안 돼 형이 뒤늦게 군입대를 하게 됐다.

동시에 나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목욕탕 종업원 일을 몇 년간 하게 됐다. 일에만 전념해서인지 위장병이 생겨 고통이 심했다. 죽을 것 같이 아파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고 치료해 봤지만 점점 더 아프기만 해 결국 참지 못하고 고향 공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형수님은 병을 갖고 귀향한 나를 걱정하시며 한의원에 가 한약한재를 짓고, 개고기까지 해서 주셨다. 덕분에 그 아팠던 위장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됐다. 지금도 공주에 계신 형수님께 감사한다. 이후 나도 군입대를 할 나이가 됐다. 징병검사를 하는데 그 동안 내가 위장병으로 고생한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얼마나 못 먹고 고생을 했는지 너무 말라 몸무게가 44㎏으로 미달돼 한 해 연기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결국 다음 해에 공익근무요원으로 판정을 받고 군 생활을 하게 됐다. 지겨운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친구의 소개로 일화제약 대리점에 취직을 했다. 그 곳에서 판매와 배달, 수금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마침 그곳이 통일교재단이라 인연이 돼 이단교회에 10여년간 다닌 적도 있었다.

그곳을 나와 금성대리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한 일은 무더운 여름에 냉장고와 무거운 에어컨을 배달하고 설치해주는 것이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이 일만 할 수 없어 한동안 화물차를 사서 사과장사를 한 적도 있었는데 단속반에 쫓겨 하루 몇 군데를 옮겨다니며 팔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택배기사도 했었다. 2년 정도 이 택배 일을 했었는데 하루는 높은 빌딩을 방문해 5000원 짜리 택배물건을 배달해주고 내려와 보니 차에 5만원 짜리 주차위반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두 다리 힘이 쭉 빠진 경험이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쉬운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런 일 저런 일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우연히 개인택시 기사들을 발견했다. 차를 몰고 느긋하고 여유있게 운전하는 기사들을 볼 때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세상만사 아무 걱정이 없을 것만 같아 꼭 해보고 싶었다.

결심 끝에 상계동에 있는 고려택시에 입사했다. 그 때가 1990년 2월이었는데 7년만 무사고 운전을 하면 개인택시면허를 주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8년, 10년……. 세월은 점점 흘러갔지만 면허는 나오지 않아 초조해졌다. 또 티오가 없어 못준다는 말까지 나와 낙심했다.

다른 길을 찾아보고자 마음먹었지만 초등학교만 나오고 나이도 적지 않아 막막할 뿐이었다. 배우지 못한 한도 있고 해서 신설동에 있는 검정고시 전문학원에 문을 두드렸다. 입학 후 누구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낮에는 택시운전을,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했고 역시 보람이 있었다.

1년 후 중학교 검정고시 시험을 치렀는데 영어가 40점으로 과락이었다. 6개월 후 치른 재시험에서는 합격의 기쁨을 맛봤으며 꿈에도 그리던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됐다. 이어서 고등학교 과정도 마치게 됐다. 호텔 이름도 읽을 수 있고 내 이름을 영어로 쓸 수 있는 것이 너무도 기뻤다. 공부를 하면서 한 가지 더 얻은 게 있었다. 검정고시 공부를 할 때 학원에서 나처럼 늦게 공부하러 온 여학생을 만나게 됐는데 바로 지금의 아내가 된 장숙희 전도사님이다. 뒤늦게 행복을 알게 된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방송통신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어엿한 대학생의 신분을 누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토록 손꼽아 바라고 기다리던 개인택시 면허를 따게 됐다. 택시를 시작한 지 15년만인 2005년 6월15일이었다. 나는 택시기사의 유일한 꿈인 개인택시 사장님이 됐다. 지금까지 잘한 게 있다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일이고, 아내 장숙희 전도사님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이룬 일, 그리고 늦게나마 배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하루 안전운행도 힘든 일인데 15년을 무사고로 지켜주시고 지금껏 30여년을 큰 사고 없이 보호해 주시고 20여년을 열심히 믿음생활로 장로의 직분을 주셨다. 또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게 인도해 주셨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도우심이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던 중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이재엽 기자의 소개로 웃음택시 프로젝트에 참여해 강의를 들었고 ‘웃음택시로 수입이 짭짤해졌다’는 기사를 쓴 후 티뉴스의 기자가 됐다. 앞으로 부족하지만 기자로서의 소임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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