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4화 단종 장가가다
 

1. 삼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단종의 국혼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지 한 달 뒤부터였다. 문종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국혼을 할 수가 없는데도 수양대군은 국혼을 서둘렀다.
한시라도 국모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세종이 생전에 자신의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에게 단종의 양육을 맡긴 적이 있는데 혜빈 양씨가 그 공을 등에 업고 내명부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혜빈 양씨가 자기의 주변 인물로 왕비를 내세운다면 수양대군으로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수양대군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국혼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리고 계유정난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왕위를 넘본다는 소문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비를 뽑는 일은 수양대군으로서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외척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내명부가 안정이라도 되는 날이면 수양대군은 발 불일 곳이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은 국혼을 서둘렀다.

세조가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좌찬성 이사철, 좌참찬 이계린 등과 더불어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외롭고 약하시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원하오니, 청컨대 이를 맞아들이소서.”
하니, 하명하기를,
“불가하다.”
하였다. 이에 세조가 다시 아뢰기를,
“왕비를 맞이하는 일은 이미 준비되었사오니, 신 등은 기어이 허락을 받아야겠습니다. 청컨대 경중과 대소를 깊이 생각하셔서 처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 단종실록 1년 12월 28일 >

단종은 국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장가들지 못한다는 법을 태종이 만들지 않았더라도 단종으로서는 국혼을 쉽게 윤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혼은 곧 불효이기 때문이었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사회에서 불효는 어떤 이유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나 단종의 윤허와는 상관없이 수양대군은 왕비 간택을 서둘러 진행했다.

2. 왕비 간택에 속도를 내다

왕비 간택을 위한 심사에는 수양대군의 인물들로 채워졌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을 중심으로 정인지, 한확, 최항 등이 삼간택에 나섰는데 효령대군은 수양대군에게 우호적인 인물이었고, 정인지와 한확은 수양대군과 사돈 관계를 맺은 인물이었으며, 최항은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그날 도승지로서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핵심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다.
왕비 후보에는 이미 수양대군의 친구인 송현수의 딸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혜빈 양씨와 수양대군의 넷째 동생인 금성대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야욕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에게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금성대군은 자기의 처가 쪽 집안인 최도일의 딸을 왕비 후보로 내세웠으나 수양대군의 세력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3. 송현수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다.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친구 사이로써 그의 누이동생이 세종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에게 출가하여 왕실과 인연을 맺은 집안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으니 여산 송씨 집안으로선 겹으로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 셈이다.

왕비로 간택된 정순왕후는 단종보다 한 살이 더 많은 15살이었다. 14살에 왕비를 맞이한 단종에겐 결코 이른 혼사는 아니었다. 8대 임금 예종이 11살에 장가들어 12살에 인성대군을 낳았으니 그에 비하면 늦장가를 든 셈이다.
그렇게 하여 국혼은 단종 2년 1월 22일에 이루어졌다.
왕실에서는 송현수에게 면포(綿布) 6백 필, 쌀 3백석, 콩 1백 석을 하사품으로 내렸다.

권력이란 부자지간에도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괴물이다. 그러니 수양대군과 송현수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 우정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서로가 장애물이 될 뿐이었다.
훗날 송현수는 수양대군으로부터 토사구팽당하고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이 이야기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운명> 편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4. 단종 고집을 피우다

국혼이 치러진 다음날 단종의 어명은 또 한 번 조정을 뒤흔들었다.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은 신료들의 청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으나 마음이 편치 못하니, 중전을 궁으로 들이는 일을 정지시키라.”|
< 단종실록 2년 1월 23일 >

그러자 집현전에서까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미 왕비를 책봉하여 국모가 되었는데 어찌 하루라도 민가에 둘 수 있겠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오직 성삼문만이 반대했다. 그는 국혼 문제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을 하옥시키고 모든 관직을 거두어버렸다. 국문장으로 끌려 나가 고문을 받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래도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단종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어명을 거두어들이고 왕비를 궁으로 들이게 하였다.

이로써 단종의 국혼은 완성되었다.

- 25화 <단종 옥좌에서 쫓겨나다>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이전 글 읽기 링크
오피니언>칼럼>

저작권자 © 티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