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문종 현릉에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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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문종 현릉에 묻히다
  • 정원찬 기자
  • 승인 2019.09.0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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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0화 문종 현릉에 묻히다
 

1452년 5월 14일에 문종이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의정부에서는 3도감, 즉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을 설치했다. 빈전도감은 발인까지의 모든 절차를 담당하게 되고 국장도감은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게 된다. 마지막으로 능을 조성하는 일을 산릉도감이 맡게 되는데 고된 일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

산릉도감이 맡은 일 중에서도 능지를 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즉 명당을 찾아내어 왕릉을 씀으로써 차기 왕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고 그렇게 되면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당시 최고의 풍수로는 최양선, 이정녕 등이 있었지만 실무와 학문을 겸비한 인물로는 정인지를 따를 자가 없었다. 일찍이 세종은 자신이 묻힐 자리를 미리 정했는데 그 자리를 두고 최양선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라고 예언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에겐 그런 초능력을 지닌 지관은 필요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형님 문종이 묻힐 곳으로는 최고의 길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흉지가 필요했다.

1. 수양대군이 전면에 나서다.

3도감(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의 총 책임자는 영의정 황보인이 맡고 각 도감에도 책임자를 임명했다. 그 중 산릉도감에는 영의정 황보인, 좌찬성 정분(좌의정 남지가 중풍을 앓고 있어서 좌찬성이 그 자리를 대신함), 우의정 김종서, 그리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모두 7명이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은 풍수에 관한 책을 들고 다니면서 산릉도감 제조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그리하여 능지로 선택된 곳이 지금의 내곡동 부근인 헌릉 주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농시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 목효지가 몰래 단종에게 작은 쪽지를 올리게 된다.

2. 목효지가 목숨을 걸다

목효지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안산 소릉에 묻힐 때도 그곳이 흉한 땅이라는 상소를 세종에게 올린 적이 있던 그 사람이었다. 당시에도 소릉은 풍수지리적으로 자손이 끊어지는 흉지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었다.
그랬던 목효지가 목숨을 걸고 단종에게 또 비밀 글을 올린 것이다.
단종실록의 글을 인용해 보자.

목효지가 비밀한 서간으로 아뢰기를
“헌릉은 주인이 약하고 객은 강하여 산의 근원이 끝난 땅이요, 수맥은 등져 흐르고 혈도는 굽으니, 좋은 땅처럼 보일 뿐 정룡(正龍) 정혈(正穴)이 아닙니다.”하였다.
<단종실록 즉위년 6월 5일>


헌릉은 객이 주인보다 강하여 제3의 인물에게 힘이 실리는 땅이고 이미 정기가 다한 땅이므로 왕릉으로선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좋은 땅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좋은 땅이 아니라 이미 기가 다 끝난 땅이라는 것이다. 헌릉에 묻힐 세종의 능지를 두고 당시 유명한 지관이었던 최양선은 그곳을 후손이 끊기고 장남을 잃는 땅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그곳에 묻혔는데 훗날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에 와서는 후손이 끊기는 비극이 일어나 그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최양선은 문종의 사후 권력의 전면에 나선 수양대군에 밀려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보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효지가 나선 것이다.
수양대군이 애써 선정한 능지가 전농시 노비에 불과한 목효지에 의해서 뭉개져 버리는 순간, 수양대군에겐 목효지가 목에 가시보다 더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단종이 이 편지를 도승지 강맹경에게 보여 주고 말았다. 강맹경은 문종의 죽음과도 깊숙이 개입한 수양대군의 최측근 인물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세종이 묻혀 있는 곳이 헌릉인데 그래서 그곳은 당연히 명당인데 목효지 따위의 헛소리에 흔들릴 수는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래서 마침내 문종의 능은 수양대군이 정한 그 장소로 결정될 뻔했다. 그런데 산릉도감에서 능 조성을 하는 과정에 그곳이 물이 솟는 습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풍수학의 대가 정인지는 그곳이 습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단순했다. 지금은 물이 솟지만 수맥이 없으니 장차 염려할 것이 없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풍수학의 최고인 정인지의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당장 물이 솟는데 그것을 보고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영의정 황보인은 그런 정인지를 두고 옹졸한 사람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양대군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상식에도 벗어난 일을 두고도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결국 조금 옆쪽으로 옮기는 선에서 타협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관이 묻힐 깊이에서 이번에는 돌이 나왔다.
결국 정인지의 주장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태조가 묻힌 건원릉 주변으로 능지를 옮기기로 했다.

국장도감의궤

 

3. 목효지의 죽음

헌릉 주변이 흉지임이 밝혀지자 목효지는 대안으로 마전현(지금의 양주)의 북쪽을 추천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목효지의 의견을 따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목효지를 신분이 천하고 한쪽 눈이 멀어 사사로이 출세하고 싶은 욕망으로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를 씌워 안성 역참의 노비로 쫓아버렸다.
그러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단종의 최측근인 금성대군(단종의 숙부), 혜빈 양씨(단종의 양할머니), 영양위 정종(단종의 매형)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는 과정에서 목효지도 이들과 함께 역모죄로 엮어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4. 문종 현릉에 묻히다

문종은 결국 지금의 동구릉(구리시 소재)의 동남쪽에 혼자 묻혔다. 안산 소릉에 묻혀 있던 왕비 현덕왕후를 헌릉으로 옮겨와야 하는데 그만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즉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과 관련하여 단종의 외가는 역모의 집안으로 몰렸고 그에 연루시켜 현덕왕후는 폐위되고 말았다. (현덕왕후의 폐위와 복위는 다음 글에서 다루어집니다.)
문종은 살아서도 재위 기간 동안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이었다. 현덕왕후는 문종이 세자 시절 단종을 낳고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뒤에 왕비로 추존되었을 뿐이고 새 왕비를 맞이하지도 못하고 문종은 숨을 거두었다.
시동생에 의해서 폐위된 현덕왕후. 그래서 문종은 죽어서도 혼자가 되었다. 동생 때문에 부인의 무덤을 잃은 채 74년 동안 혼자였던 문종은 중종 때 현덕왕후가 복위되자 현릉에 함께 묻혔다.

- 21화 <풍수의 대가 정인지>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 이번 주부터 연재는 주2회(월, 목) 업데이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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