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9화 단종의 출생과 어머니 현덕왕후의 죽음

 현덕왕후는 충청도 홍주에서 아버지 화산부원군 권전과 어머니 해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려서 세자궁의 궁녀로 들어갔다. 14살에 승휘(4)가 되고 세자 향(훗날 문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녀 나이 15살에 딸을 낳았으나 하루 만에 죽었다. 세종에겐 첫 손녀여서 중전과 함께 몹시 슬퍼하였다.

그러나 현덕왕후 19살이 되던 해 봄에 다시 딸을 얻었는데 그 딸이 바로 단종의 누이가 되는 경혜공주(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이다 경혜공주의 탄생으로 그녀는 양원(3)으로 품계가 높아졌으며 그해 세자빈이 되었다. 두 명의 세자빈이 쫓겨난 그 자리에 권양원이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경혜공주 때문이었다. 딸을 낳았으니 아들이라고 못 낳을까? 그 생각으로 세종은 권양원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세자빈 자리에 오른 지 4년이 지나고 24살이 되던 여름 날, 세자빈은 세종이 그렇게 바라던 원손(훗날 단종)을 낳았다.
세종은 그날의 기쁨을 실록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세자 연령이 이미 서른이 거의 되도록 아직도 후사를 얻지 못하여 내가 근심하였는데, 이제야 적손(嫡孫)을 낳았다. 이것은 신()과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할 바이요,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일이다. <세종실록 23723>

원손이 태어난 그날을 축하하고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해서 세종은 중죄인을 제외한 죄인들을 방면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
세자빈은 그렇게도 기다리던 원손을 낳고 다음날 하루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

병이 위독하여, 임금께서 잠시 동안에 두세 번이나 친히 가셔서 문병을 하였는데 끝내 숨을 거두니 임금과 중전께서 매우 슬퍼하여 수라를 폐하였고,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종실록 23724>

세종은 세자빈에게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왕후보다는 격이 낮지만 공주보다는 한 등급 위로 격을 올려 장례를 치르도록 명을 내렸다. 즉 세자는 소대(흰 허리띠)30일 동안 하고, 임금과 중전은 소대를 5일 동안 하며, 조회는 5일 동안 정지하게 하여 세자빈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그리고 세종은 서둘러 새 궁을 지어 세자를 동궁에서 나가 살게 했다. 현재의 동궁은 두 명의 빈()을 생이별하고, 한 명을 사별한 매우 상서롭지 못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자빈 권씨가 살던 자선당과 세자의 처소인 비현각, 경혜공주가 자라고 단종이 태어나던 그 동궁은 그렇게 해서 주인을 잃고 말았다. 훗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움켜쥐던 그날, 정난공신들이 축하연을 벌이는 장소로 쓰이게 될 줄을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세종은 원손의 탄생을 신성시하기 위하여 전국에 명을 내려 원손(元孫)이란 이름을 가진 자는 개명토록 명하고 또한 앞으로 태어나는 자의 이름도 원손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은 원손을 생산한 세자빈을 위해 지관 최양선으로 하여금 최고의 길지를 찾도록 했다
. 최양선이 고른 길지는 바다가 보이는 안산에 있는 와리산 중턱이었다. 와리산은 안산군 읍내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산이었다.

단종 태어나던 날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단종 태어나던 날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그때 전농시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 목효지가 풍수지리적으로 그곳이 흉한 땅이라는 상소를 세종에게 올렸다. [덧붙인 글 ] 참조.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끊어진다는 주장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다가 가까워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세종은 걱정하고 있었는데 대가 끊어진다고 하니 노비가 올린 상소라고 하여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세종은 여러 대신들을 장지에 보내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문제점이 드러나면 다른 곳을 찾으라고 명한다.

다른 지관들을 데리고 안산을 다녀온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효지의 주장이 틀렸다고 보고하지만 그렇다고 목효지의 주장을 완전히 반박하지도 못했다
. 그래서 능은 그곳에 쓰되 방향만 바꾸는 것으로 매듭을 짓고 현덕빈의 무덤을 소릉(昭陵)이라 이름하였다.

발인은 916일로 정해졌다. 현덕빈이 숨을 거둔 지 두 달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영구가 안산으로 출발했다. 호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이 영구차를 받들고 경복궁을 나서는데 도성 사람들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현덕빈의 덕을 기렸다.

부드럽고 지혜로운 덕과 아름답고 고운 용모가 양궁(兩宮-세종과 소헌왕후)에게 사랑을 받아 세자빈에 책봉되셨고, 의식대로 빈()의 법도를 닦으시어 미덥게도 세자의 짝이 되셨도다. 원손이 탄생되어 울음소리 아름다우니, 종묘에 경사가 넘쳤고 기쁨이 천지에 가득하였는데,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이[]마저 안 주셨는가? 자는 듯 세상을 떠나시매 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슬픈들 어이하리, 말씀이나 돌에 새기리라. < 세종실록 23921>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뒤 세조는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낸 뒤 죽였다. 또한 현덕왕후를 죄인의 어머니라 하여 연좌시켜 폐서인하고 그 무덤을 파헤쳐 관을 바다에 버리는 패륜을 저질렀다. 목효지의 예언은 세조에 의해 완성된 셈이었다.

【덧붙인 글 1】 목효지란 누구인가?
목효지는 전농시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로써 한쪽 눈이 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개국공신이었다가 태종 때 역모에 가담하여 화를 입은 재상 목인해(睦仁海)의 아들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없다.
비록 노비였으나 그가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한문에 능했으며 풍수에 관한 많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노비 신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풍수학에 관한 능력을 세종으로부터 인정받아 잠시 노비 신분에서 풀려나 풍수에 관한 말단 벼슬을 하는 행운을 얻었으나 불당을 세우는 일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서 다시 전농시 노비가 되었다.
문종이 죽자 그는 수양대군의 눈을 피해 단종에게 비밀 글을 올려 문종의 왕릉인 현릉이 잘못되었음을 고하였다. 그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게 될 줄은 그도 알지 못했다. 목효지의 최후는 문종 편에서 다시 한 번 다루고자 한다.


10화 <세종대왕자 태실과 단종의 태실> 편은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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