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7화 세종의 며느리 욕심 (2) - 임영대군과 며느리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살이 되던 해, 개국공신의 후손인 남지의 딸과 혼인하였다. 명문 집 규수를 고르고 골라 선택한 며느리였다. 
그런데 부인 남씨는 12살이 지났는데도 소변을 가리지 못하였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혀가 심히 짧아 말이 어눌하며 가끔 정신질환을 보이기도 하였다. 종실에서는 그런 딸을 속인 채 대군의 부인으로 시집보낸 남지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세종은 조용히 이혼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서 군부인 남씨는 혼인한 지 한 달 만에 이혼을 해야만 했다.
실록에 의하면 군부인 남씨는 친가, 외가에서 비슷한 병 경력을 지닌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전적으로 타고난 병인 듯하다. 

영의정 황희 등이 아뢰길
부부는 일생을 같이할 사람인데 이와 같은 몹쓸 병이 있는 사람을 어찌 대군의 배필로 삼겠습니까? 그 아비 남지가 애초에 병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죄가 작지 아니하나 이제야 따져 무엇하겠나이까? 그 조부 남경문(南景文)이 미친병이 있었고, 남지의 장인 이문알(李文斡)의 친족에도 이 병이 있었으니, 속히 내어보내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세종실록 15년 6월 14일>

 군부인 남씨를 내보내고 같은 해 세종은 중전과 함께 처녀 11명을 궁중으로 불러 배필을 골랐다. 임영대군의 배필로는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최사강의 손녀이자 요절한 최승녕의 딸을 간택하였다. 그녀가 제안부부인 최씨이다.
자녀는 제안부부인 최씨와의 사이에서 5남 2녀를 두었고 측실에서 4남 5녀를 더 두었다. 

임영대군 묘역 및 사당 표지판(경기도 의왕시 소재)

1. 문란한 여성 관계 

임영대군은 나이 19살에 악공의 딸인 기녀 금강매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 세종에게 첩으로 들이고 싶다고 고백을 했다. 세종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서 이를 허락했다. 승지 허후 등이 미천한 신분의 여자를 첩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지만 세종은 종사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며 끝내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임영대군은 내자시의 여종 막비(莫非)와 사통하였으며 중궁 시녀 금질지(金叱知)와도 사통하였다.
그 무렵 임영대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또 있었는데 바로 상의원에서 일하는 노비 가야지(加也之)였다. 그녀는 이미 임영대군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마냥 아들을 손을 들어주던 세종도 더 이상 임영대군을 감싸고 돌 수는 없었다. 여색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점은 눈감아 줄 수 있어도 학문을 게을리 하는 아들을 두고볼 수는 없었다. 
세종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곁에 머무는 여인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첩으로 들인 기생 금강매는 고향 공주로 내려 보내고, 막비와 금질지는 다시 노역장의 종으로 보냈다. 가야지에게는 남해로 유배 가는 가장 중한 형벌을 내렸다. 

 2. 가야지의 운명은?

남해 금산에 가면 조화바위가 있다. 상사암 가장자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바위가 바로 조화바위이다.
이 조화바위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온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이 사랑했던 여인, 가야지에 대한 전설이다.
임영대군이 어느 날 밤에 궁중 뜰을 거닐고 있었는데 멀리 우물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려 발길을 옮기고 보니 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속이 비치는 무희복을 입고 춤을 추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7살에 궁에 들어와 17살이 되던 지금까지 허드렛일만 해 오던 무수리 가야지(加也之)였다.
그렇게 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들이 1년이 넘게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던 어느 날.
그들의 사랑이 탄로 나면서 가야지는 사약을 받게 된다. 천한 신분으로서 대군을 사랑했다는 죄목이었다.
임영대군은 형님 수양대군에게 달려가서 사랑하는 여인 가야지를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임영대군을 불쌍하게 여긴 수양대군이 세종에게 읍소하여 겨우 사약을 면한 가야지는 머나먼 남녘 땅 남해로 귀양을 가야만 했다.
가야지는 이곳 금산에다 초옥을 짓고 사랑하는 님 임영대군을 그리며 매일매일 상사암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 평생 동안 사무치게 대군을 그리워하다가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임영대군의 죽음 소식을 들은 그녀는 죽어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상사암 전경(출처:남해인터넷뉴스)
남해 상사암 전경(출처:남해인터넷뉴스)

 3. 임영대군의 행보

여색을 멀리하지 못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는 임영대군에게 세종은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대군의 직첩을 회수하고 먼 변방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1년이 지난 뒤 복권하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또 사고를 쳤다. 궐 밖의 여인 2명을 남복(男服)을 입혀 몰래 궁 안에 들이려다가 광화문 문지기에게 발각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여 임영대군은 다시 재산과 대군 직첩을 빼앗기고 3년 가까이 대궐 안에서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해, 그는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형인 안평대군이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을 위해 충절을 다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에 비하면 그는 수양대군을 지지한 덕분(?)으로 부귀를 누리다가 50세에 죽었으니 비교적 장수를 누린 셈이다.

- 8화 < 세종의 며느리 욕심 (3) - 영응대군과 며느리>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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