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6화 세종의 며느리 욕심 (1) - 문종과 세자빈

 왕실을 튼튼히 하는 요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후손을 많이 생산하는 일이다. 그래서 세종은 18명의 왕자를 두었다.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적자 8명의 대군을 두었으며 후궁에서 서자 10명을 더 두었다. 그러나 정작 대통을 이을 세자(훗날 문종)와 세자빈 휘빈 김씨 사이는 후사가 없었다. 결국 휘빈 김씨는 이혼을 당하고 쫓겨나게 되었고 이어 두 번째 세자빈으로 순빈 봉씨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불미스런 일로 후사 없이 이혼을 당했다.
세종은 새 세자빈으로 처녀 간택을 하지 않고 후궁 중에서 간택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비록 딸이긴 하지만 이미 세자의 핏줄을 생산한 경험이 있는 후궁 권씨를 세자빈으로 뽑았는데 훗날 그녀가 단종을 낳게 된다. 

1. 휘빈 김씨 

세자 향(문종)이 14살이 되던 해 세종은 후사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세자보다 4살 위인 휘빈 김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했다. 체격이 크고 잘생긴 세자를 두고 명나라 사신들조차 입이 마르도록 외모를 칭찬한 것을 보면 세자는 상당한 상남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 세자에게 가문만 보고 뽑은 휘빈 김씨가 마음에 끌리지 않았던지 세자는 효동과 덕금이라는 두 시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때 시녀 호초가 세자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비방을 휘빈 김씨에게 가르쳐 주게 된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훔쳐다가 태워서 그 재를 남자에게 먹이면 사랑을 뺏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그 비방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다른 비방까지 동원했다.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든 시도했다.
결국 그런 투기 행각이 발각되어 시녀 호초는 참수되고 휘빈 김씨는 2년 만에 세자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2. 순빈 봉씨

 휘빈 김씨가 폐위되자 세종은 다음 세자빈으로 심사숙고 끝에 명문가 중에서 미모를 겸비한 규수를 고르게 된다. 그래서 맞이한 두 번째 세자빈은 세자와 동갑인 순빈 봉씨였다.
그 무렵 세자의 마음은 후궁인 권씨(단종의 어머니)와 홍씨에게 가 있었다. 세종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런 세종의 마음이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휘빈을 폐하고 다시 봉씨(奉氏)를 간택했는데, 서로 금슬이 좋지 못한 지가 몇 해나 되었다. 내가 중전과 함께 늘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 후에는 조금 대하는 모양이 다르게 되었지마는, 침실의 일까지야 비록 부모일지라도 어찌 자식에게 다 가르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18년 10월 26일 기사 중에서>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봉씨는 관심을 끌기 위해 임신을 했다고 소문을 냈다. 그 소식은 온 궁중을 기쁘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거짓이 탄로 날까 봉씨는 두려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낙태를 했다고 둘러대게 된다. 하지만 낙태한 흔적을 찾지 못해 이상히 여긴 늙은 궁녀에 의해 허위 임신임이 밝혀지고 말았다.

세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순빈 봉씨는 급기야 여종 소쌍과 동성연애에 빠지게 된다. 잠시라도 소쌍이 자리를 비우면 화를 내기 일쑤였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순빈 봉씨의 악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녀 소쌍이 다른 여종과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질투를 해서 소쌍을 감시하는 여종을 따로 붙이기도 했다. 질투의 대상이 된 시녀 중에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구타를 당하는가 하면 때로는 죽을 지경에 이를 만큼 맞기도 했다.
세종이 소쌍을 불러 진상을 조사할 때 소쌍이 진술한 말을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제게 동침을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세자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18년 10월 26일 기사 중에서>

 그녀는 질투심 뿐만 아니라 사치도 매우 심했고, 술도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 몹시 취하기를 좋아했으며 술이 모자라면 사가에서 가져와 마시기도 하였다고 실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봉씨는 그녀의 친정아버지가 죽은 지 백 일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근신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세종은 봉씨의 이런 악행에도 불구하고 쉽게 폐위하지 못했다. 이미 첫 며느리 휘빈 김씨를 폐출한 전례가 있어서 봉씨마저 이혼을 시키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첫 며느리를 쫓아낼 때의 기세라면 동성연애 한 가지만으로도 이혼의 사유로 충분했다.
그러나 당시 궁 안에서 일어나는 시녀들끼리의 동성연애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내명부에선 곤장 70대 내지 100대 정도로 다스렸는데 세자빈의 이런 행동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세자빈의 경우도 시녀들의 전례에 따라 곤장으로 죄를 다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그녀에게 투기심, 음주 행위, 사치심을 더하여 두 차례에 걸쳐 봉씨의 부덕함을 신록에서 언급했다. 그러고 난 뒤에야 마지못하여 폐출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조정에 밝히고 봉씨를 폐출하게 된다.

 3. 양원 권씨

 세종은 두 세자빈을 폐하고 세 번째 세자빈을 고르는 일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휘빈 김씨나 순빈 봉씨를 뽑을 때처럼 명가의 규수 중에서 새 세자빈을 간택하는 쪽보다 후궁 중에서 간택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심성을 모르는 규수를 뽑는 것보다 궁에 오래 살아 심성이 드러나 검증이 된 후궁 중에서 새 세자빈을 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새로 얻는 것과 본래부터 궁중에 있으면서 국모될 심성을 지닌 사람을 뽑아 세우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후회가 없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8년 12월 28일 기사 중에서>

 세종은 결국 후궁 중에서 가문이 좋고 덕망이 있는 자를 세자빈으로 간택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양원 권씨였다. 양원 권씨는 세자보다 네 살 아래로 평소 세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던 터였고, 더욱 세종의 마음을 움직인 건 양원 권씨가 이미 딸(훗날 경혜공주)을 낳았기 때문에 아들도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권씨는 4년 만에 세종의 바람대로 훗날 단종이 될 원손을 낳게 되는데 불행히도 출산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역사의 비극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설사 문종이 일찍 죽더라도 왕비가 살아있었다면 단종을 지켜줄 배후세력이 되었을 터였다. 그런 배후가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덕왕후의 이른 죽음은 수양대군이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 셈이었다.

문종이 왕이 되자 세자빈 권씨는 세자의 모후로서 현덕왕후에 추존되게 되었으나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현덕왕후는 죄인(단종)의 어머니라 하여 폐위되고 말았다.

- 7화 <세종의 며느리 욕심 (2) - 임영대군과 며느리>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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