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따라 역사 따라♣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의 역사 이야기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3화 계유정난 – 안평대군을 잡아라(2)

1. 안평대군의 예술적 천재성

세조에 의해 안평대군의 천재성은 철저하게 왜곡되고 훼손되었다. 안평대군은 왕이 태어날 기운을 지닌 땅에 집을 지어 무계정사라 이름 짓고 역모를 꿈꾸었으며, 양어머니를 간통한 패륜을 저질렀다는 등 온갖 죄목을 붙여 안평대군의 천재성을 왜곡하고 훼손했다. 심지어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고 계집종을 간음한 성폭력범으로 몰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신뢰성을 잃은 실록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인데 그 이유는 계유정난의 친위 세력에 의해 왕조실록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 각종 미디어에서 그려진 안평대군의 인물 묘사는 대부분 부정적인 모습으로 많이 그려져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뿐만 아니라 태종도 수양대군보다 안평대군을 더 아꼈다. 문종도 그랬다. 특히 문종은 동생 안평의 글씨체를 본으로 하여 불교 경전을 인쇄하는 동판활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경오자(庚午字)이다. 경오년(1450)에 만들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조가 집권한 뒤 경오자 활자는 사라져버렸다. 안평대군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오자를 모두 녹여 다른 용도로 써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글씨는 명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안평대군의 작품을 얻기 위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기를 서로 원했다고 하니 그의 글씨에 대한 인기는 가히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이었다. 그 인기 덕분으로 안평대군은 조선으로 들어오는 사신을 통해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여러 작품과 서적을 수집할 수 있었다.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이 222점, 서적이 1만여 권인 것만 보더라도 안평대군의 열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많은 재물이라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에서 그의 예술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2. 안평대군이 소장한 작품들의 행방은?

안평대군이 17세부터 10년간에 걸쳐 모은 작품은 모두 222점이었다. 그는 어느 날 가장 아끼고 따르던 집현전 학사 신숙주에게 모두를 기록으로 남기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신숙주는 화가, 제목, 화평을 넣어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자신의 문집인 보한재집에 전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당, 송에 이어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유명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여기에는 안견의 그림 30여 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은 계유정사에 불을 질러 안평대군의 흔적이라면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렸다. 그 주옥같은 222점의 작품도, 그 많던 장서들도 모두 재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안평대군이 10월 18일에 사사되었으니 그가 죽은 지 7일 이내에 그의 모든 흔적을 없애버린 셈이다.

⚑ 단종실록 1년(1453) 10월 25일 기사
- 그때에 이용(안평대군)과 이현로의 집에 괴상하고 신비스런 글이 많았는데, 세조가 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

3.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서른 살이 되던 어느 봄날, 꿈을 꾸었다.
깊은 골짜기에 우뚝 솟은 봉우리, 복숭아꽃 수십 그루가 만발한 그 골짜기가 너무 황홀하여 계곡을 따라 길을 오르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데 한 야인이 나타나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 야인이 가르쳐 준 대로 나아갔다. 꾸불꾸불한 냇물을 따라가다가 기암절벽을 지나니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나는데 복숭아꽃이 만발한 그곳은 안평대군이 평소에 꿈에나 그리던 선경 같은 그런 곳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다음날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명하여 그 선경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는데 이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이다. 안평대군이 발문을 쓰고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 당대의 문장가 21명이 선경을 찬양하는 시를 덧붙여 놓았다.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한 시대.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음악을 정리하고 나라는 태평하여 백성들은 노래하던 시대. 이상국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는 꿈을 21명의 학자들과 함께 그리면서 시로써 노래했다. 그러던 그들도 무리지어 수양대군을 도와 조선을 피로 물들이는 역모에 가담해 버렸다. 권력 앞에선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다시금 실감나게 한다.
복숭아 꽃잎에 금가루를 발라 화려함을 뽐내던 몽유도원도가 세월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일본 도서관에 갇혀 주인을 잃은 탓이지 금가루는 떨어져 나가 화려했던 자태는 퇴색되긴 했지만 그래도 불후의 명작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 텐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안견과 안평대군과의 일화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윤휴(1617~1680)의 <백호전서>에 안견과 안평대군의 기막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안평대군은 북경에서 사온 용매묵(龍媒墨)을 안견에게 내리고는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안평대군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 보니 용매묵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화가 난 안평대군이 노복들을 꾸짖었다. 노복들은 결백을 주장하면서 곁눈질로 안견을 의심했다. 그때 안견이 일어나 소매를 떨치며 변명을 하던 중에 소매 안에서 먹이 떨어졌다. 안견의 짓이 분명했다. 배신감을 느낀 안평대군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얼씬도 하지 마라”고 쫓아냈다. 안견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했다.

안견은 세종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이 가장 아끼던 화가였다.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간파한 안견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봐 되도록 안평대군을 멀리 하려 했다. 그러나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견은 위 이야기를 주변에 흘렸다.

실제로 안평대군으로부터 안견이 버림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안평대군이 안견을 아꼈다는 이유만으로 수양대군에겐 안견이 제거 대상이었다. 그래서 뒷날 안견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이 안평대군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읍소함으로써 그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5.. 사후

안평대군은 무덤조차 없다. 계유정난으로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후에 양손자를 들여 대를 잇기는 했지만 절손된 것이나 다름없다. 장남 이우직은 계유정난과 관련하여 처형되었고, 차남 이우량은 계유정난 직전 후사 없이 어린 나이로 병사했다.

세종 생전에 성주 선석산 자락에 18명의 아들과 단종의 태실을 이곳에 모아 조성했는데 세조 집권 후 자신과 뜻을 달리한 형제들과 단종의 태실을 파괴해 버렸다. 이때 안평대군의 태실도 함께 파괴해 버렸다.
그러니 안평대군은 무덤도 태실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비록 36살의 짧은 삶을 살다간 그는 그러나 그 이름만은 영원히 남아 있다.

- 4화 계유정난 <살생부>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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