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박희옥 기자

박희옥 기자

살아생전에 부친은 장남(내 큰형)이 훈장이 되면 안정된 생활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사범학교’ 졸업에 목을 맸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식의 효도를 보기도 전에 작고하셨다. 큰형은 더 높은 목표에 뜻을 두고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졸업할 때까지 각고의 노력과 형설의 공으로 중고교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결혼하고 삼남매 자식을 낳아 사회에 내보냈으며 중년에는 신학을 해 목회를 하며 살다 74세에 영면했다.

나는 어떤가? 가난한 집 막내이다 보니 큰 꿈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조실부모에 형들 잔심부름에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장래에 대한 이상이 형성되지 않았다. 공부도 초등학교는 ‘그’럭저럭, 중학교는 ‘겨’우겨우, 고등학교는 ‘간’신히 졸업하고 대학은 ‘그’만 두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생활전선에 너무 절박한 날이 많았다. 내 학력은 ‘그’, ‘겨’, ‘간’, ‘고’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니 ‘ㄱ’자라고 할 수 있겠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막내인 나는 지지리도 가난이 길었다. 흥부처럼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37세까지도 건설현장 주변을 배회하는, 변변한 직업이 없는 놈팡이였다. 오늘날 37세는 거개가 대학 졸업에, 결혼도 하고, 자녀 낳고, 마이홈‧마이카에 행복을 구가하는 시대 아닌가?

가난에서 해방되고자 37세이던 1977년에 내가 택한 게 택시운전이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건설과 자동차가 붐을 이룰 때 운전면허를 따고 택시운전을 하면서 차차 가난을 벗게 되었다.

당시는 불친절, 과속난폭, 부당요금 같은 단어가 택시업계의 대세였지만 나하고는 먼 이야기였다. 서비스업답게 나는 인사와 친절의 선봉자였다. 더구나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이라는 인류의 제전이 있을 때마다 승객들에게 우의와 질서를 보여주고자 했다. 영어가 필요할 때는 국제감각을 갖추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영어 대상을 수상했고 친절기사상까지 겸하면서 신문, 방송, TV에 화제의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60세 때 간염과 췌장염으로 3년간 치료를 하며 죽는가 했다.

이제 나는 77세 노파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 과학기술문명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것을 목격해 왔지만 컴퓨터 인공지능이 바둑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장면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것 만들어낸 게 인간이니 인류는 참으로 위대하다. 그런데 인류가 개발한 무기보다도 더 힘이 센 것이 있으니 바로 예리한 통찰력과 판단력으로 부정을 낱낱이 파헤치고 정의를 지키는 언론이다. 글로써 독자를 깨우치고 심성을 개발케 해 귀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니 기자의 사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A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펜은 칼보다 강하다) 늦깎이 기자로 내 글에 영감을 받는 이가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나에겐 귀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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