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얼을 되새겨 조형물, 테마로 조성한 벽화, 음악이 흐르는 향수에 자극

길거리 공연, 이벤트로 행사 시연, 즐길 거리 가져

김광석 길 입구 전경 (사진/배기수 기자)
김광석 길 입구 전경 (사진/배기수 기자)

김광석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고향 대구 중구 소재(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6-11)에는 그를 기리는 거리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하, 김광석 길)'이 있다. 그 길에는 김광석을 기억하게 하는 수많은 조형물과 테마로 이루어진 벽화가 있고, 종일 그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길은 김광석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주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김광석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의 노래와 싱금을 울리는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특히 청.중년층의 폭넓은 사랑을 받은 시대적 최고의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이기도 하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위치하고 있는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6-11 일대는 거리조성 이전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로 어둡고 슬럼화 된 공간이었다. 방천시장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통해 슬럼화 된 공간을 밝게 꾸미는 프로그램이 계획되어졌으며, 김광석이 대구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김광석 길 테마로 조성된 벽화 모습
김광석 길 테마로 조성된 벽화 모습

길의 명칭은 김광석이 1993년과 1995년에 각각 발표한 음반 ‘다시부르기’ 에서 착안하여 지어졌으며 ‘그리기’는 김광석을 그리워하면서(想念 Miss) 그린다(畵, Draw)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2010년 11월 20일 90m구간으로 처음 오픈을 했고, 이후 계속해서 작품의 수를 늘려가서 현재 수성교~송죽미용실 350m 구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2014년 가을, 전면 재단장을 했다. 현재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주말에는 평균 5,000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전국에서 몰려오고 있으며 명실상부한 대구를 대표하는 명소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김광석 길 소규모 공연장
김광석 길 소규모 공연장

관광객이 몰리면서 김광석 길에는 카페와 음식점, 액세서리점, 웨딩숍 등이 빼곡히 들어서며 아연 상권이 활기를 띠고 있다. 새로 생겨난 점포만 수백개에 이른다. 특히 다양한 취향의 카페와 맛집들이 속속 입주하고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면서 김광석 길은 이제 만남의 거리이자 맛의 거리, 문화예술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한편 그의 아버지 김수영씨는 대구사범대학 출신으로 4.19 혁명 직후인1960년 5월 17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인 교원노조를 결성하는데 동참하였다가 교사직에서 해임당한 뒤 금은방에서 일하다가 시장에 전업사를 차려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김광석은 5살때인 1968년서울 창신동으로 이주하여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가요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 

1989년 그룹 동물원을 나온 김광석은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타에서 첫 개인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활동중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 서해순과 결혼하게 된다.

1991년에 발표한 제2집은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6년 1월 5일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날'을 부른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대중들에게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김광석은 1996년 1월 6일(향년 31세) 자신의 거주지였던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원음빌딩 5층 계단에 목이 매여 숨진채 발견되었으며 사망 관련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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