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서방, 오랜만일세. 그동안 식구들 건강하고 잘 지내셨는가? 서로가 일 년에 몇 번 전화만으로 안부를 묻기 아쉬워 오늘은 모처럼 편지를 쓰는 바일세. 서울에는 오후에, 지나는 겨울을 장식하듯 첫눈이 뿌옇게 내려서 문득 자네 생각이 나는군그래. 우리가 이천에서 만난 뒤론 이러구러 얼굴 본 지가 두어 해 넘은 듯싶어 소식도 궁금하니 말일세.

나는 덕분에 무고하게 지내고 있다네. 식구들 나름대로 직장에 나가 일하고 초등교 2년생 손녀 녀석도 귀엽게 자란다네. 난 역시 밤낮 쫓기며 글 쓰고 강연도 다니는 처지라서 분주한 생활이라 싶네. 어쩌면 정년한 뒤에 더 바쁜 편이라서 이래저래 모임에도 다 못 나간다네. 재작년 말엽에는 두 해 연속 밀린 원고들과 여러 날 밤샘하다가 지쳐서 졸도할 뻔 했었지. 다행히 외숙모가 도와주고 해서 이겨낸 뒤로는 밤은 새우지 않고 있으니 걱정은 말게. 알다시피 장모님의 언니이신 우리 매씨께서는 95세인 요즘도 서울동생한테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로 안부를 물으실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니까 말일세.

어언 70대 중반인 내 나름대로 건강 챙기기에 신경을 쓰고 있다네. 한약방 아들로서 몇 십 년을 해마다 봄, 가을로 보약으로 다져온 체력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아. 정년 후의 7년 동안 주말 농장에 나가서 머리도 식히고 농촌의 정취를 만끽하며 손수 상추, 쑥갓, 열무 채소 등을 가꾸며 살고 있지. 보름 전에도 세곡동에서 기른 배추를 90포기나 김장해 놓았으니 언제 강남에 들르거든 외숙모한테서 얻어다가 석무 엄마랑 며칠 먹어보게나.

외삼촌이 글 쓰다가 힘이 든다고 엄살을 부려 미안하네그려. 따듯한 방에서 테이블 앞에 앉아서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는 우리는 아무래도 호강이라 싶거든. 새벽부터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운전대를 잡고 시내 안팎을 누비며 일하는 자네 기사분들 처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 그런데 특히 30여년을 그렇게 이겨낸 박 서방을 보면 고맙고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네. 자네는 아마 어릴 적에 엄마께서 시골집 시렁에 올려두셨던 그 꿀단지를 송두리 째 마신 효험인지 모르겠네그려. 자네가 현방리에서 20년 전쯤에 이야기 했던 대로 말일세.

새삼스럽지만 외숙모도 박 서방 칭찬을 많이 하고 있다네. 자네 내외의 한결같은 예의범절이며 정다움과 동서인 정서방 내외와의 남다른 우애나 협력만이 아닐세. 자넨 또 우리 고향의 죽마고우로서 직접 운전기사로서 운수업을 한 친구의 정 못지않은 의리를 지키고 있어서 믿음직하다네. 거기에다 금상첨화로서는 실로 강산이 서너 번은 바뀌었을 세월동안 박 서방은 한결같이 건강한 모범 드라이버로서 훌륭한 가장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일세. 일찍 그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 여러 일을 벌여온 홍표 형을 참고해도 그렇지 않은가? 더구나 착한 남매 아이들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취업한 상태이니. 재작년엔가는 새로운 아파트로 늘려가지고 이사 간 보람 역시 오직 평소의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에서 얻어낸 보람이라 믿고 있네.

특히 외삼촌인 내가 박 서방을 자녀들 교육 잘 시켜서 행복한 아빠라고 생각하는 바는 분명하네. 그러니까 자네 장모님 돌아가셨을 때 대학생인 석무와 고3 학생 무렵인 성희가 말일세. 며칠 동안 지친 데다 부산한 가운데 남들은 거의 잠들어 있는데도 자네 남매 녀석들은 외할머니를 밤새내 지키고 있었거든. 향을 지피고 촛불을 켠 채 할머니와 끊임없이 대화하듯 무릎꿇고는 꼬박 새우더란 말일세. 요즘 곧잘 비싼 공부하며 명품 산 것도 모자라 어른들한테 불만하고 탈선하는 청소년에 비하면 얼마나 갸륵한 지 외삼촌은 눈여겨보았다네. 그것은 평소 남의 집 아이들처럼 호사는 못시켜주더라도 가정교육에 철저한 박 서방과 양선 부부의 알뜰한 가르침 덕이라 믿네.

지금 서울 일대는 갑자기 많이 내린 눈으로 시내 골목길 차들이 멈추어 섰거나 엉금엉금 거북이 걸음일세. 이렇게 서설이 내리는 날에도 우리는 왜 다 함께 기쁨으로 노래하면서 지낼 수 없을까. 모처럼 내린 서설이라 신난다는 느낌보다는 이럴 때 택시 기사분들은 얼마나 애타고 힘들까 싶어 나는 자네가 걱정되곤 하네. 여름철이라면 옛날 라디오 방송의 선율에서처럼 가끔씩 <가로수를 누비며>를 들으며 신나는 노래라도 흥얼거릴 수 있으련만. 그래도 얼마 후면 반드시 날씨가 풀리고 봄이 오듯 현안의 택시문제도 개선될 터이니 참고 견디면서 이겨내길 바라네.

밤낮 가림없이 택시를 몰고 달리는 일에 바쁘고 지치면 때로는 따분하겠지만 떳떳하고 분명한 긍지도 가졌으면 좋겠네. 자네도 짐작하리라 싶은데 이런 말은 외삼촌의 노파심에서 만에서가 아닐세. 사실 우리 일선 기사분들은 거의가 서민가정의 가장인 동시에 명랑사회를 이루는 당당한 구성원이며 나라 발전을 위한 봉사자일세. 한국에서 택시 일을 해보는 시장이나 도지사가 없지 않지만 일본에는 진짜 택시기사에 여러 명의 박사 말고도 인기 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교포 문학가도 있다네.

부디 겨울철의 미끄러운 길에서 안전에 유의하고 손님들께 더욱 친절을 잃지 말기 바라네. 또 항상 건강에 유의하여 틈나는 대로 등산이나 산책 아니면 조기축구 등으로 몸을 잘 추스르길 부탁하네. 그리고 이번 성탄절 무렵에 경애네 집 갈 때는 되도록 외삼촌과 동행했으면 좋겠네. 아무쪼록 연말연시에 온가족이 건강한 가운데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기원하면서.

2012년 12월 5일 서울에서 외삼촌 보냄

작가 이 명 재


이명재

문학박사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김소월재론으로 등단
한국문협 평론분과 회장, 평론가협회 부회장 역임
중앙대 문과대학장 역임, 현재 위 대학 명예교수
이음새에세이문학회 지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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