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환자들의 친구/푸른 눈의 선교사의 삶-

나환자들의 친구 맥켄지 선교사
나환자들의 친구 맥켄지 선교사

♧.제임스 노블 맥켄지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활동한 호주 출신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는 한국식 이름이 매견시(梅見施)이다. 1865년 3월 7일 스코틀랜드의 아일 유(Isle Ewe)라는 섬에서 아버지 케네드(Kenneth) 맥켄지와 어머니 캐더린(Catherine) 사이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1882년 무디 부흥 집회를 통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85년 영국 글래스고대학에 입학하였고, 1891년 아일랜드 트리니티대학에 입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다. 1894년 7월 마거릿 켈리(Margaret Kelly)와 결혼하였으며, 그해 12월 목사가 되었다. 1895~1908년 빅토리아장로회 선교사로 산토(Santo)섬에서 15년간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산토섬에서 부인 마거릿 켈리가 사망하였다. 1910년 2월 21일 45세에 호주 장로교선교회 파송을 받고 부산에 입국하였다.

☆1912년부터 울산을 비롯한 경남 지방에서 목회 및 선교 활동을 통해 지역의 초기 개신교 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센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애원한센병원 병원장을 맡으며 ‘한국 나환자의 친구[Friend of Korean Lepers]’로 불리며 한센병 환자와 그 자녀들을 위한 의료 및 양육, 교육 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울릉도를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 그곳에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가 부산에 왔을 때 13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겔손 엥겔 선교사와 함께 울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0년 울산을 포함한 동부 경남 지역의 순회 전도 활동을 하던 메리 켈리(Mary Kelly)를 만나 재혼하였다. 제임스 노블 맥켄지는 울산의 첫 개신교 교회인 울산병영교회와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에 세워진 보은교회 등에 순회 목회를 하며 세례를 주었다. 또한 서생 지역에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 서생교회에 합병된 재성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하였다는 사실이 구전을 통해 전하는데, 이에 관한 기록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12년 당시 관할한 울산과 온양, 기장, 동래, 부산 등의 동부 경남 지역의 교회는 약 20개이었으나 1916년에는 5개 지역에 52개로 늘어났고, 그 관할에 세례를 받은 교인 수는 1,2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1939년 한국의 선교사직에서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호주의 이민 정책, 백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1956년 7월 2일 호주 멜버른에서 91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국에서 재혼한 부인 메리 켈리도 교육자로 큰 공을 남겼으며, 슬하에 네 딸을 두었는데 두 딸인 헬렌 맥켄지와 동생 캐서린 맥켄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53년 9월 부산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건립하였다.

☆1930년 6월 11일 제임스 노블 맥켄지 활동 20주년을 맞아 나환자관리협회가 주도하여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공단 옆에 기념비를 세웠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훈장을 수여하였다.

☆1942년에서 1946년 사이에 기념비가 분실되었으나, 2001년 처음 건립된 부근 일신기독병원에 복원하였다. 2011년 5월 호주에서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의 한센인 대상 봉사를 추모하기 위해서 멕켄지한센선교회가 설립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펼쳐 가고 있다.

맥켄지 선교사
맥켄지 선교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의 삶을 

살다간 맥켄지 선교사

당신은 단 한번의 인생의 삶을

 

 

Tnews미디어 칼럼기자/박재하 시인/parkha1960@naver.com
Tnews미디어 칼럼기자/박재하 시인/parkha19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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