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39화 성종의 죽마고우 정미수

- 수빈(인수대비)과 경혜공주는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의경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덕수궁 옛터로 밀려나 있던 그녀에게 남편 정종을 능지처참으로 잃고 의지할 곳 없던 경혜공주가 찾아왔다. -


1. 동병상련의 꿈

어린 두 아들을 안고 사저로 물러난 수빈(인수대비)은 날개를 잃은 한 마리 가련한 새에 지나지 않았다. 한때 꿈꾸던 중전의 자리도, 아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 용상에 오르는 꿈도 모두 잃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와의 끈은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무렵 경혜공주는 남편을 능지처참으로 여의고 어린 아들 정미수를 데리고 만삭의 몸으로 순천 관노가 되어 있었다. 이를 가련히 여긴 정희왕후가 경혜공주 모자를 궁으로 불러올렸다. 정희왕후는 정미수를 수빈 사저에서 자산군과 함께 살도록 하는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 자산군의 나이 여섯 살, 정미수는 일곱 살이었다. 정미수에겐 자산군이 외사촌 동생이니 공부도 함께 하며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수빈과 경혜공주의 처지가 동병상련이니 자산군과 정미수 역시 동병상련이었다. 아버지를 뜻하지 않게 일찍 여의고, 높은 꿈을 접어야만 했던 처지가 서로를 의지하게 만들었다.
세조는 이 무렵 경혜공주에게 공주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집과 노비를 하사하는 등 화해의 몸짓을 취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역적이고, 아들은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혜공주는 세조에게 남편의 신원회복과 아들의 면천을 세조에게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세조의 공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버티고 있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경혜공주는 아들을 수빈에게 맡기고 올케인 단종비 정순왕후가 머물고 있는 정업원으로 들어가 불교의 귀의하였다.
세조는 죽을 때까지 악연의 매듭을 풀어주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다만 아들 예종에게 정미수의 신원을 되찾아 주라는 유지를 남긴 채.

2. 죽마고우가 성종으로 즉위하다

열두 살에 자을산군으로 개명한 성종은 다음 해 조선 9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수빈도 아들과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궁을 떠난 지 어언 13년이 흐른 뒤였다.
어린 임금을 대신해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이미 왕대비(수빈)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동병상련을 함께 겪은 왕대비는 성종의 명을 받들어 16살인 정미수를 돈녕부 직장(종7품)에 제수하였다. 경혜공주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비록 남편의 신원은 회복되지 않았으나 아들의 신원이 회복되었으니 그 은공은 오로지 왕대비에게 있었다.

KBS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
KBS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

3. 끊임없는 파직 요구

중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세조의 공신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어명이었다. 정미수의 신원 회복은 계유정난의 정당성이 허물어지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온 조정 신료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미수의 파직을 주청했다.

신숙주(申叔舟) 등이 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어제 정미수(鄭眉壽)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었으나, 유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세조의 유교는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생명을 보전하고자 한 것뿐이었습니다. 정종(鄭悰)이 반역을 범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아들이 조정의 반열에 선다면 국가의 위엄이 어찌 서겠습니까? 빌건대 어명을 거두어 주소서.“
<성종실록 4년 5월 2일>

한 달 넘도록 정미수를 파직하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성종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세조의 유지를 앞세워 파직하라는 여론을 잠재웠다.

4. 경혜공주 눈을 감다

아들이 관직에 나가던 그해, 경혜공주는 병을 얻고 말았다.
정미수는 퇴청하는 대로 관복을 벗지 않고 어머니의 똥을 맛보면서까지 병을 보살폈다. 그러나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경혜공주는 39살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자녀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니 그 한이 오죽하였으랴.
훗날 경혜공주의 딸이 출가할 때에도 성종은 잊지 않고 많은 곡식과 면포를 하사품으로 내려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5. 후손

성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정미수는 연산군 때에 이르러 당상관이 되었으며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해평부원군에 책봉되는 영화를 누렸다. 그는 천수를 다하고 57세에 죽었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었다.
정미수의 후손들은 대대로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의 제사를 지켜왔는데, 정효준의 대에 이르러서는 벼슬도 하지 못해 가세가 매우 기울었다. 정효준은 3번이나 결혼했지만, 부인들이 모두 일찍 죽고 자식도 남기지 못해 늙은 홀아비로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였다. 그나마 부사(府使)를 지낸 친구 이진향과 교류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야사에 의하면 하루는 정효준과 이진향이 함께 장기를 두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정효준이 이진향에게 "자네의 딸과 결혼해 자네의 사위가 될 수 없겠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이진향은 "황당한 일을 다 본다"며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이진향의 꿈속에 단종이 국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정효준과 너의 딸을 결혼시켜라"라고 명했다. 이진향은 꿈속에서는 그리하겠다고 했지만,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라 부인과 상의했다. 당연히 부인은 "가난뱅이 홀아비와 딸을 결혼시킬 수 있냐"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 꿈속에서 다시 단종이 나타나 "왜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느냐"며 부인에게 곤장을 때렸고, 결국 정효준의 청혼을 수락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이후, 정효준도 "사실 나 역시 꿈속에 단종이 나타나 '이진향의 딸과 결혼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정효준은 이진향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엔 아들들을 낳아서 모두 높은 벼슬을 하고, 정효준 역시 높은 벼슬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40화 <연재를 마무리하며>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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