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38화 인수대비

- 인수대비로 불리는 소혜왕후 한씨(1437 ~ 1504년)는 한확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의경세자)에게 출가하여 군부인이 되었고 세조가 즉위하자 남편 도원군이 세자가 되면서 함께 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세자가 스무살에 요절하면서 세자빈의 지위도 잃게 되었다. -


1. 한확

인수대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아버지 한확을 알 필요가 있다.
태종 때 세 차례에 걸쳐 조선의 여자를 뽑아 명나라에 공녀로 바쳤는데 한확의 누이가 이에 선발되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의 3대 황제인 영락제는 뛰어난 외모를 가진 여비 한씨(한확의 누이)를 사랑한 나머지 여비를 후궁으로 봉하였다. 부인이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 절을 한다고 했던가. 영락제는 한확의 잘생긴 외모에 호감을 갖고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심지어 부마(사위)로 삼으려고까지 했다. 한확이 조선으로 돌아가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긴 했지만 그만큼 영락제의 신임을 받았다.
영락제가 몽골 원정 도중에 병사하게 되자 그의 무덤에 순장(죽은 사람과 함께 묻히는 제도)할 대상으로 30여 명이 선정되었다. 그 중 여비 한씨도 순장 대상이 되어서 그녀를 목 졸라 죽인 뒤 영락제의 무덤에 함께 묻혔다. 그녀가 죽기 직전 유언을 하는 도중에 형을 집행하던 환관이 발 디딤판을 빼버리는 바람에 유언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다.
영락제가 죽고 그의 아들 홍희제의 뒤를 이은 5대 황제 선덕제가 황제에 오를 무렵이었다. 당시 명나라에 새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조선에서는 공녀를 선발하여 보냈는데 여비 한씨의 막내여동생 한계란이 언니를 닮아 얼굴이 아름답다는 보고를 받은 명나라에서 한확의 여동생을 공녀로 요구했다.
한계란은 언니의 비극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회피하려 노력했으나 오빠인 한확의 강요를 이기지 못했다.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는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또 무엇을 더 바라려 하오?”
하고 오빠를 원망하며 비단이불을 칼로 찢어버리고 혼수감을 죄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갔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한계란은 훗날 정통제의 황태자를 죽을 위기에서 보호한 공으로 공신태비(恭愼太妃, 혹은 공신부인)라는 존칭까지 받고 평생 동안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하여 조선에서 왕이 등극하거나 세자를 책봉하는 등 명나라의 승인이 필요할 때마다 한확은 책봉 고명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오는 임무를 맡곤 했다. 세종이 즉위할 때에도 책봉 고명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무렵 명나라와의 외교적인 문제는 한확을 빼고는 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한확에게 사돈을 맺자고 제의한 수양대군의 속셈은 어쩌면 일찍부터 권력에 대한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종이 즉위하던 해, 수양대군은 장남 도원군과 한확의 막내딸 한씨와의 혼사를 서둘렀다. 한확의 둘째딸이 계양군에게 출가한 것을 보면 어쩌면 이 혼사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 혼사인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계양군은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愼嬪金氏) 소생의 서자이다. 계양군의 어머니 신빈 김씨는 내자시의 노비였다가 소헌왕후의 궁인으로 있을 무렵 세종의 성은을 입어 태어난 사람이 계양군이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장남 도원군이 계양군과 동서가 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양군과 엮인다는 것이 탐탁지 않더라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명나라의 힘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수양대군은 한확을 선택했다. 정략혼사였다.

실제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을 때 명나라의 고명을 얻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확이 해 냈으니까.
한확은 세조의 책봉 고명을 명으로부터 받아들고 귀국하던 중 56세로 객사하고 말았다.

2. 세자빈이 되다.

문종이 즉위하던 그 해, 14살인 한씨는 한 살 아래인 도원군(훗날 의경세자)과 혼인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자 한씨도 세자빈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도원군이 스무 살에 요절하게 되자 세자빈의 지위도 잃고 말았다. 이때 슬하에는 세 살 된 월산대군과 태어난 지 한 달된 자산군(훗날 성종)을 두고 있었다.

세자의 자리가 시동생인 해양대군에게 넘어가자 한씨는 궁에서 나왔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궁을 나와 남편의 사당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를 안쓰럽게 여긴 세조는 그곳에 왕족들이 사는 여느 집보다 더 큰 집을 지어 주었다. 그 집이 지금의 덕수궁이다. 훗날 둘째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한씨는 다시 궁궐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녀가 살던 집에는 장남 월산대군의 사저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이 집을 왕의 거처로 임시 사용하게 되면서 비로소 궁이 되었다.

인수대비의 사저로 만들어졌던 덕수궁
인수대비의 사저로 만들어졌던 덕수궁

3. 인고의 세월

사저로 물러난 한씨는 세자빈의 지위를 잃고 수빈(粹嬪)에 봉해졌다. 남편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왕비가 될 것이고 아들은 보위를 이어받을 터였다. 그러나 이젠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온전하기를 바라는 초라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세자 자리를 이어받은 시동생 해양대군이 한명회의 셋째 딸을 세자빈으로 들임에 따라 세자의 자리는 더욱 공고해졌고 수빈으로선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 그런데 세자빈이 인성대군을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17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해양대군과 한명회의 인연이 끝난 셈이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수빈은 재빨리 움직였다. 12살이던 한명회의 막내딸을 11살이던 둘째 아들 자산군과 혼인을 성사시킴으로써 수빈은 다시 권력 앞으로 다가설 기회를 만들었다. 이듬해 즉위한 예종은 용상에 오른 지 15개월 만에 요절하자 이젠 셈법이 달라졌다. 예종의 후사는 네 살 된 제안대군밖에 없었다.
결국 왕권은 열세 살 된 자산군에게로 넘어왔다. 오로지 한명회의 힘이었다.
조선 9대 임금 성종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강보에 쌓인 어린 성종을 안고 궁을 나온 지 13년 만에 궁으로 돌아왔다.

**39화 <성종의 죽마고우 정미수>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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