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정종(鄭悰), 경혜공주의 남편으로 살다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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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정종(鄭悰), 경혜공주의 남편으로 살다 죽다
  • 정원찬 기자
  • 승인 2019.11.0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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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36화 정종(鄭悰), 경혜공주의 남편으로 살다 죽다

- 경혜공주를 아내로 맞아 향덕방에 신혼살림을 차린 지 2년 남짓. 영양위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처남 단종, 검은 속내를 드러낸 수양대군이 단종마저 죽이더니 기어이 영양위마저 능지처참시켰다. 세조의 마지막 정적이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1. 정종(鄭悰)은 누구인가?
세종의 장남인 문종은 정실 소생으로 남매를 두었다. 경혜공주와 단종이 그들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을 지극히도 사랑했던 세종은 죽음이 가까울 무렵이 되어서야 손녀딸의 혼사를 서둘렀다. 자기가 죽기라도 한다면 이후 3년 안에는 혼인이 금지되기 때문이었다. 왕가의 딸이 대개 12살 전후하여 혼인하는 것에 비하면 경혜공주의 나이 열다섯이니 상당히 늦은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한 경혜공주의 배필은 형조참판을 지낸 정충경의 아들 정종(鄭悰)이었다. 정충경의 가문은 일찍부터 세종과 인연이 깊었다. 그의 누이는 세종의 형수(효령대군 부인)가 되었으며 그의 딸은 세종의 막내며느리(영응대군 부인)가 되었다. 영응대군이 정종에겐 사사로이 매형이면서 처숙부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인연도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악연으로 변해 갔다. 효령대군이나 영응대군 모두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편에 서자 정종의 집안은 사면초가에 이르게 되었다. 누이도 영응대군으로부터 버림받고 친정으로 쫓겨나는 아픔을 맞보아야만 했다.

2. 생애
문종이 일찍 승하하고 이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의지할 데 없던 단종은 누이인 경혜공주의 사가를 자주 찾곤 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그날도 단종은 경혜공주의 사가에 머물고 있었다. 김종서 등 많은 충신들의 목숨이 하루 밤 사이에 떨어지는 역사의 현장을 정종은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적의 제거 작업이었다. 장차 권좌에 오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먼저 단종의 주위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부터 세조는 서둘렀다. 그 대상으로 단종의 유모 역할을 했던 혜빈 양씨와 그 아들들, 금성대군, 영양위 정종 등이 꼽혔다.
역모는 정적을 제거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이들도 역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어떤 군사 행동이나 징후도 없었는데 파당을 지었다는 것이 역모의 이유였다. 이 일로 하여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영양위 정종은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단종복위운동 등 세조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조금씩 더 먼 곳으로 쫓겨났다.

3. 광주에서의 유배 생활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하려는 거사를 꿈꾸다가 사사되고 그 여파로 단종 역시 영월에서 사사되었다. 결국 그것으로 세조의 정적 제거 작업은 완성된 셈이었다.
그 무렵 정종은 전라도 광주 인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종의 복위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 하나로 삶을 버텨 왔는데 그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유배지까지 따라온 경혜공주와 함께 암자에 올라 성탄(性坦) 스님과 더불어 불법을 듣는 것을 유일한 소일거리로 삼았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마지막 칼날이 영양위 정종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라도 관찰사 함우치가 장계 한 통을 조정에 올렸다. 소위 역모를 고발하는 장계였다. 그 내용이 너무 조잡하고 허무맹랑한 것이어서 전문을 다 실을 가치가 없어 요약 인용으로 대신해 본다.

광주에 안치된 정종이 어느 날 경비를 서고 있던 지킴이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삼칠일 동안 먹지 아니하고 참선하여 지금은 이미 성불(成佛)하였고, 내 몸에 향기 가득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닿았으니, 만약 이 사실을 조정에 빨리 보고하지 않으면 이 고을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 하면서, 몸을 떨쳐 뛰어오르고 발로 문짝과 담장을 차며 미친 듯 행동하고 말을 하는데, 지킴이가 주위를 살피다가 숨어 있던 성탄(性坦)이란 자를 잡아들이고, 또한 관련된 자를 잡아들였습니다. 정종이 가지고 있던 경문(經文) 한 통도 올려 보냅니다. 정종이 잡인들과 서로 통하던 것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 것이 명백하니, 죄악이 깊고 무겁습니다. 국문을 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세조실록> 7년 7월 26일

관찰사라면 대단한 학식을 가진 인물일진대 역모 고발장 치고는 너무 허술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정종이 어느 날 자기가 성불하였다고 지키미에게 떠벌리고 있었는데 그 옆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있어 잡아 보니 성탄이라는 중이었다. 이들은 자주 함께 소통하고 지내는데 수상하니 국문을 해서 역모를 밝혀 달라는 상소였다.
그리하여 정종과 관련자 모두를 의금부로 압송하여 심문을 하였다.
정종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충신인 내가 주상(단종)을 지켜드리지 못해 이미 죄인이 되었으니, 빨리 죽여 주면 전하께 달려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할 뿐입니다.”

임금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 빨리 죽어 전하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정종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성탄은 참형을 당했으며 그 밖에 네 명이 유죄를 받았다. 역모 같지 않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그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능지처참에 끝나지 않고 그 시신을 부위별로 나눠 각 지방 고을에 내려 보냈다. 역모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4. 사후
정종은 시신이 없으니 무덤이 없다. 다만 아내 경혜공주가 잠든 무덤(경기도 고양시 소재) 곁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잠든 아내를 장승처럼 우뚝 서서 지켜보는 모습이 내내 애처롭게 느껴진다.

경혜공주의 묘(좌측)를 지키고 서 있는 남편 정종의 비석(우측)
경혜공주의 묘(좌측)를 지키고 서 있는 남편 정종의 비석(우측)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노비가 되었다. 세조는 죽음을 눈앞에 둘 무렵에 겨우 경혜공주의 신원을 노비에서 공주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정종의 자식은 끝내 신원을 회복시켜 주지 않았다.
악연의 매듭은 성종 때에 와서야 겨우 풀렸다. 자식들과 남편의 신원을 회복시키려던 경혜공주의 외로운 싸움을 성종이 해결해 주었다. 아들 정미수에게 관직을 내려주었으니 관비였던 신분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정종은 능지처참으로 죽은 지 297년이 지난 영조 34년에 신원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영양위부원군에 추증되었다.

** 37화 <허무한 권력, 세조 눈을 감다>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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