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단종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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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단종의 죽음
  • 정원찬 기자
  • 승인 2019.10.2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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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34화 단종의 죽음


1. 단종을 사사하다

세조 3년 6월 말, 금성대군이 모반을 기획하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온 이후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4개월여 동안 순흥 지방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정인지와 신숙주가 합세하여 세조에게 주청을 올렸다.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이 같은 모반은 끊임없을 것이므로 모반을 일으킨 금성대군은 말할 것도 없고 단종도 함께 사사하여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운옥> 과 <죽창한화>에 기록된 기록을 보자.

○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 <대동운옥>
○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 <죽창한화>


또한 양영대군은 3일간 연속으로 상소를 올렸다. 결국 세조는 양영대군의 상소를 받아들여 10월 21일 단종을 사사하였다.
그런데 단종의 죽음에 대해 세조실록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께서 명하시길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년 10월 21일>

위 실록에서 세 가지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단종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해 놓은 점이고, 두 번째는 죽은 날짜이며,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처리 과정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가장 역사 왜곡이 심한 것은 세조실록이다. 특히 단종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내용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기술된 내용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된 내용을 유추해 보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역사 해석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조실록이다.

2. 단종이 과연 자살했을까?

먼저 자살 여부에 대해 살펴보자
후세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단종의 죽음은 왕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영월로 가서 사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에서는 장인인 송현수의 죽음 소식을 들고 자살했다고 했다. 실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송현수의 죽음 소식이 한양에서 영월까지 전해지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은 셈이 된다. 이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단종의 자살에 대한 세조실록은 신뢰성이 없다 하겠다.

3. 왜 사망 날짜가 다를까?

다음으로는 사망한 날짜에 대한 기록의 차이 문제를 보자. 조선 전기의 여러 야사를 묶은 <해동야언>에 단종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10월 24일에 노산군을 사사하였다. <병자록>에는 유시(酉時)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에 신하들이 노산군을 처형하여 노산군을 향한 백성의 마음을 단념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사관이 기록하기를, “노산군이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하였다.

위 기록을 살펴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금성대군과 송현수 등을 처형하고 사흘 뒤에 단종을 사사했으며, 백성들의 단종을 향한 충심을 단념시키기 위해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사를 집행한 시간이 유시(17시~19시)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개 낮에 형을 집행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초저녁 집행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음력 10월 24일이라면 유시는 어둠이 완전히 드리운 시간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죽이기 위해 의도된 시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실제 죽음보다 사흘 먼저 죽었다고 기록한 점도 의아스럽다. 그러나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금성대군 등이 10월 21일에 처형된 것을 보면 단종도 같은 날 사사 어명이 내려진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물론 실록에는 이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여론을 의식하여 몰래 처리해야 했으니 당연히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한양을 출발하여 영월까지 가는데 2, 3일은 소요되었을 것이고 그러고 보면 사흘 뒤인 24일에 사사되었다는 <해동야언>의 기록은 사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이 아닐까 추증을 가능케 한다.

4. 사후 수습

마지막으로 사후 처리 과정을 살펴보자.
단종의 장례와 무덤에 관한 실록의 기록으로는 중종실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중종의 어명을 받은 우승지 신상(申鏛)은 단종의 무덤을 찾아 제사지내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 보고에 의하면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가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겠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덧붙여 보고하기를 고을 아전이었던 엄흥도라는 사람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이 자리에 장사를 치렀다고 하였다.
여러 야사에서는 이에 관한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통곡하면서 관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영월 북쪽 5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때 엄흥도의 주위 사람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렸는데 엄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하였다. <영남야언> <병자록>

<연려실기술> <아성잡설> <축수록>에서는 단종의 죽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노산군이 해를 입자, 관에서 명하여 시신을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전의 이름(엄흥도를 지칭)은 생각나지 않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관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다.

 

단종의 무덤 장릉(영월)
단종의 무덤 장릉(영월)


5. 복위

종합해 보면 ‘후하게 장사지냈다’는 세조실록은 잘못된 기록임이 분명하다. 엄흥도에 의해 수습된 단종의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나 다름없이 전해져 오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사후 241년 만에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그 무덤을 장릉이라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조실록 3년 10월 21일 기사는 기사 전체가 허위로 날조되었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조선 중기에 이자(李耔)가 쓴 <음애일기>를 덧붙여 본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단종을 행한 백성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정인지 같은 간적 놈들에게 핍박받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제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에 임금을 팔고 이익을 꾀하던 무리들은 반드시 자기 임금을 혹심한 화란에 몰아넣고야 마음에 쾌감을 느꼈으니 이런 자들을 엄흥도에 비하여 보면 어떠한가. 촌 부녀자나 동네 아이들은 군신의 의리도 알지 못하고 직접 흉한 변고를 보지 못하였건만, 지금까지 분하게 여겨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새어 나오고 전하니, 사람의 본성이란 속이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제35화 <님 그리는 마음 정순왕후>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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