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30화 충신의 잔인한 죽음


1. 육신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면서도 충절을 굽히지 않았던 충신을 사육신이라고 한다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충절을 굽히지 않은 생육신도 있다. 그 생육신 중 한 분인 남효온은 <육신전>을 저술하였는데 본 글은 <육신전>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낸 일이 늘 마음에 걸렸던 남효온은 어느 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꿈을 꾸었다. 왕후를 폐위시키고 소릉(현덕왕후의 능)마저 파헤쳐 물가에 버리는 세조의 패륜을 비판하고 현덕왕후를 다시 복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임사홍 정창손 등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세상을 등지고 유랑 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1504년 갑자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현덕왕후의 무덤인 소릉의 복위를 주장했다 하여 그를 부관참시하였다. 중종(1513년) 때 비로소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그는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그가 저술한 《육신전》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간행되었다. 정조 6년(1782년)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2. 유성원

유성원(柳誠源)의 자(字)는 태초(太初)이다.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뒤 공신들은 집현전에 명하여 수양대군의 공을 표창하는 교서를 쓰게 하였다. 그러나 집현전의 관원이 모두 퇴청해 버리고 그때 유성원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유성원은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글을 쓰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슬피 통곡하였다고 한다. 후에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니 유성원은 단종을 복위하는 거사에 성삼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던 그날 유성원은 성균관에 있었다. 그런데 거사가 발각되어 성삼문이 먼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유성원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성삼문과 사돈지간이었던 유성원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부인과 함께 영결(永訣)의 술을 마시고 사당에 올라갔다. 유성원은 관대도 벗지 않은 채 사당 앞에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세조는 그의 죽은 시신을 끌어내 능지처참을 시킨 뒤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효수하는 형벌을 더했다.

사육신공원 내 의절사
사육신공원 내 의절사


3. 하위지

세종이 많은 인재를 양육하였는데 문종이 인재를 논하는 자리에서 하위지를 첫째로 꼽을 만큼 그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조용하고 말이 적어 한 마디를 해도 가려서 하니 버릴 말이 없고,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며, 언제나 집현전에 있으면서 경연에 임금을 모시어 보좌한 바가 많았다. 어린 단종이 왕위를 계승할 때에 숙부들의 기세가 강성하여 인심이 흉흉하였다.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에 막강하여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아뢰어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병을 구실로 사양하였다. 후에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은 뒤에도 하위지를 간절히 불렀다. 한때 하위지가 예조 참판이 되어 세조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녹봉을 부끄럽게 여겨 먹지 않고 방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세조는 그에게만큼은 불에 달군 단근질 고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능지처참 형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4. 유응부

유응부(兪應孚)는 무인으로 활을 잘 쏘고 용감하며 날래어 인가의 담을 뛰어 넘을 정도였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그를 믿고 중히 여기어 관직이 1품에 이르렀다. 병자년 거사에 성승과 더불어 별운검이 되어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궐 뜰로 잡혀갔는데, 왕이 묻기를, “너는 어찌 하려고 했느냐?”하니, 유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에 내가 한 자의 칼로써 그대를 폐위하고 전 임금을 복위시키고자 하였으나 불행히 간신들에게 고발되었을 뿐이오. 내가 다시 무엇을 구하겠소? 그대는 다만 빨리 나를 죽이시오.”하였다. 세조가 진노하며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하였다. 유응부는 굴복하지 않고, 성삼문 등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말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청하여 잔치하는 날에 나는 운검을 시험하고자 하였으나 너희들이 굳이 제지하여 말하기를, ‘아주 안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더니, 금일의 화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사람이면서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하고, 왕에게 말하기를, “만약 일을 묻고 싶으면 저 선비에게 물으시오.”하고, 곧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왕은 더욱 진노하여 명하여 불에 달군 쇠를 가지고 배꼽 아래와 넓적다리 위에 놓게 하니, 기름과 불이 아울러 끓어도 유응부는 안색이 태연하고 쇠가 식기를 서서히 기다려 그것을 내던지며, “다시 달구어 뜨겁게 해 오라.”하고, 마침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무릇 어머니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가난하여 저축해 둔 식량이 없어도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일찍이 부족함이 없었다. 키가 보통 사람을 넘고 용모가 엄숙하고 씩씩하며, 지극히 청렴하여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한 점의 고기도 없고, 때때로 양식이 떨어져 아내와 딸이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죽는 날에 아내가 통곡하며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는 잘 도와주지도 못하고, 죽어서는 큰 화를 얻었다.”하였다. 유응부는 성품이 또 용감하여 처음 거사하기를 모의할 때 여러 사람 가운데서 주먹을 휘둘러 말하기를, “권모(權某)와 박모(朴某)를 죽이는 데는 이 주먹으로도 충분하다. 어찌 큰 칼을 쓰겠는가?”하였다. 아들은 없고 두 딸이 있다.

5. 이개

이개는 고려 말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초야에 묻혀 지낸 목은(牧隱) 이색의 증손이다. 나면서부터 글을 잘하여 조부의 기풍이 있었다. 병자년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바로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대궐 뜰에서 묶이어 담금질을 당할 때 이개는 천천히 묻기를,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하였다. 생김새가 야위어 약하나 곤장 밑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장하게 여겼고, 끝내 굽히지 않아 성삼문과 함께 같은 날에 죽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나갈 때 시를 짓기를,

우(禹)의 솥이 무거울 때 생명도 또한 크나 /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 가벼운 곳에 죽음 또한 영화롭다 / 鴻毛輕處死亦榮
새벽에 자지 않고 문을 나서니 / 明發不寐出門去
현릉(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 가운데 푸르고나 / 顯陵松栢夢中靑

하였다.

6. 허후

사육신에 들지는 않지만 허후의 절개 또한 아름답다. 허후(許詡)는 영의정 허조(許稠)의 아들이다. 문종 때에 비로소 벼슬을 하였는데 벼슬마다 능력이 뛰어났다. 문종이 승하하자 유언으로 황보인ㆍ김종서가 수상이 되어 어린 임금을 보좌했고, 허후는 우참찬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어지러운 정국을 염려하여 사신행을 만류하였는데 그 인연으로 하여 계유정난 때 죽임을 면하기도 하였다.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축하의 자리에서 허후는 수심에 잠겨 즐거워하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으니, 수양대군이 묻기를, “무슨 이유냐?”하니, 허후는 조부의 기일이라고 핑계를 댔다. 수양대군은 그것이 핑계하는 말인 줄 알았으나 묻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저자에 효수하게 하고 그 자손을 죽였는데, 허후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가 있다고 효수하고 처자까지 죽이게 한단 말이오? 그리고 나는 김종서와는 교분이 깊지 않아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되, 황보인에 대해서는 내가 평소에 잘 알기 때문에 추호도 반역을 도모할 리는 없습니다.”하니, 수양대군이 말하기를, “네가 고기를 먹지 않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하였다. 허후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가 같은 날에 다 죽어가니, 내가 살아남은 것도 충분한데 또 차마 고기까지 먹겠습니까?”하고, 곧 눈물을 흘렸다. 수양대군이 매우 진노했으나 오히려 그 재덕을 아껴 죽이지 않고 외방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마침내 허후를 목매어 죽였다.

31화 <생육신 김시습과 금오신화>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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