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9화 박팽년의 충절
 

1. 왕실과의 인연

박팽년은 1417년 회덕현(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났다. 18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으로 보아 그의 성품은 청렴하기로 유명한 듯하다.


선조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찍이 친구를 천거하였는데, 그 친구가 고마움으로 밭을 주려고 하였다. 이에 박팽년이 말하기를, ‘친구 간에 주고받는 것은 비록 값진 것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 글이 있지만 이번 선물은 의심을 받을 만하니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하니, 이것이 청렴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세종은 후궁인 혜빈 양씨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 중 영풍군을 박팽년의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사돈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만큼 박팽년에 대한 세종의 사랑은 각별했다.

또한 박팽년에 대한 안평대군의 사랑도 각별했다. 안평대군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팽년과 함께 노닐었던 무릉도원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박팽년이 안평대군보다 한 살 더 많긴 하지만 그들은 죽마고우나 다름없는 사이여서 풍류를 함께 하곤 했다.
그런 인연으로 하여 박팽년은 결코 수양대군 편에 설 수가 없었다. 이들의 갈등은 수양대군이 권력을 쥐게 되면서 노골화되었다. 안평대군이 제거되고 혜빈 양씨와 그의 아들 영풍군이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수양대군과 박팽년은 결코 한 배를 탈 수 없는 운명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즉 박팽년은 죽마고우나 다름없는 안평대군을 잃었고, 사부인인 혜빈 양씨, 사위 영풍군을 모두 잃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던 날, 경회루로 달려온 박팽년이 연못에 빠져죽으려 했던 것을 보면 그의 울분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직하다.
그래서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박팽년의 의지는 나머지 사육신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즉 수양대군은 박팽년과의 원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충청도 관찰사에서 형조참판으로, 이어서 중추원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박팽년에 대한 세조의 구애는 계속되었지만 마음은 이미 세조로부터 떠나 있었던 것이다.

2. 박팽년의 충절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사모해 조용히 사람을 시켜서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숨기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했으나 박팽년 역시 성삼문처럼 세조를 전하가 아니라 "나으리"라 칭하며 거절했다.
세자가 박팽년을 직접 고문하는 장면을 <연려실기술>을 통해 살펴보자

세조가 말하길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됐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아니했으며, 녹도 먹지 않았소.”
하여 세조가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고 거(巨)자로만 써놓았다.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봉하여 두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멸 편

박팽년이 충절을 굽히지 않자 세조는 다른 사람에 비해 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박팽년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능지처참을 당하긴 했지만 죽은 뒤에 받은 형벌이어서 산 채로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고통을 피할 수 있어서 그나마 행복한 죽음이었는지 모른다.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박팽년의 가문이 가장 큰 보복을 당했다. 연좌되어 극형에 처해진 사람도 가장 많았고, 대신에게 나누어진 처첩도 가장 많았으며, 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 진 전토도 제일 많았다.

박팽년 탄신 600주년 기념 특별전(대전시립박물관)
박팽년 탄신 600주년 기념 특별전(대전시립박물관)

 

3. 박팽년의 후손

단종복위운동의 가담자 대부분의 충신들이 멸문지화를 당한 데 비해 박팽년은 멸문지화를 피했다. 그 사유가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등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박충후는 충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다. 세조가 신하들을 모두 죽였는데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였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이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六臣)들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선조실록 36년 4월 21일>

박팽년의 일족이 모두 처형될 무렵 둘째아들 박순의 처가 마침 임신 중이었다.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이 조정으로부터 내려왔다. 그런데 마침 박팽년의 여종이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출산을 같이 하게 되었다.
박순의 처는 아들을 낳고 여종은 딸을 낳았는데 여종의 슬기로 자식들을 바꿔치기를 했다. 그 하인이 주인의 아들을 거두어 이름을 박비(朴婢)라 부르고 키웠다. 장성한 뒤 성종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감사로 부임해 와서 박비를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숨어 사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쳐 주었다.

박팽년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표현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여러 문헌에서 기록되어 있다. 후손이 절손되지 않고 살아남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러다가 숙종 17년에 박팽년의 신원이 회복되었으니 실로 죽은 지 235년 만에 충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30화 <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여러 신하 >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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