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성삼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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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성삼문의 죽음
  • 정원찬 기자
  • 승인 2019.10.0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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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8화 성삼문의 죽음

1. 출생

성삼문은 외가인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군)에서 무관 출신인 성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때어날 때 하늘에서 들려오길 『이제 낳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성삼문(三問)으로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성삼문이 태어난 뒤 점을 보았더니 충신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할아버지 성달생은 이를 두고 집안 말아먹을 자식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만고에 길이 남을 충신이 되었지만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2. 단종복위운동과 성삼문

집현전 출신들은 한솥밥을 먹어온 신숙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집현전에 모여 회의를 했다. 성삼문에게 그 의견을 물었다. 성삼문의 대답은 명쾌했다. 가장 절친한 친구이기는 하나 죄가 너무 커서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두 성삼문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무신으로 하여금 각각 죽일 사람을 정하여 맡게 하였는데 형조 정랑 윤영손(尹寧孫)이 신숙주를 죽이는 책임을 맡았다.

거사 당일,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행사가 변경됨에 따라 거사는 취소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윤영손은 뒷방에서 머리를 감고 있던 신숙주를 죽이기 위해 칼집에 손을 얹은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숙주의 목이 떨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때 성삼문이 눈짓으로 윤영손을 제지하였고 윤영손은 칼을 거두고 물러났다. 신숙주는 그렇게 해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이 이야기는 성현(成俔) 등이 편찬한 설화집 <대동야승> 역대요람 편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래지 않아 거사의 전모는 김질의 밀고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성삼문에게 쇠고랑을 채운 세조가 친히 국문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반역하느냐?”
하니, 성삼문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전(前) 임금을 복위(復位)시키고자 할 뿐이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겠소? 나의 마음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데, 나으리는 무엇이 이상해서 묻소? 나으리가 나라를 훔쳤으니, 저는 신하로서 차마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하겠소. 제가 이 일을 한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오.”
하였다. 세조는 발을 구르며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왕위를 이어받을 때 제지하지 않고 이제야 나를 배반하느냐?”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부터 막지 못했던 것은 죽기만 하면 무익하니 참았다가 후일을 도모하고자 할 뿐이었소.”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너는 너를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또한 나를 어찌 나으리라고 부르냐?”
고 물으니, 성삼문은 말하기를,
“나는 정말 나으리의 녹(祿)을 먹지 않았으니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지요. 믿기지 않거든 나의 집을 몰수하여 조사해 보시오. 나으리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도 취하지 아니하였소.”
세조가 화를 참지 못하고 무사로 하여금 인두를 달구어 배꼽 아래를 지지게 하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어 탔다. 성삼문은 인두가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오너라.”
하고 굽힘이 없었다.
이때에 신숙주가 곁에 있었는데, 성삼문이 꾸짖기를,
“전일에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 ‘훗날 이 아이를 잘 보필하여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벌써 잊었느냐?”
하니, 신숙주가 몸 둘 바를 모르므로 세조가 신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성삼문이 죽고 나서 그 집을 몰수하니 세조 즉위 이후부터의 받은 녹봉은 한 방에 따로 두어 받은 날짜를 기록해 두었고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노량진 사육신 공원 - 사육신 뇨역으로 오르는 길
노량진 사육신 공원 - 사육신 뇨역으로 오르는 길

3. 죽음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편에 성삼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게 전한다. 기록을 편집하면 다음과 같다.

사형장으로 성삼문을 실은 수레가 출발했다. 그러자 대여섯 살쯤 된 그의 딸이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했다.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지만, 너는 딸이니까 살 거야.”

드디어 수레는 군기감 앞 거리에 도착했다. 거열형이 집행될 곳이었다. 시지가 찢겨 죽을 성삼문의 최후를 보기 위해 옛 동료들이 빙 둘러섰다. 만조백관에게 모두 참관케 하는 세조의 어명 때문이었다.

성삼문은 좌우에 늘어선 옛 동료들을 향하여 말했다.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성세를 이루어라. 나는 죽어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시를 남겼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 擊鼓催人命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니 /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머물꼬 / 今夜宿誰家

그렇게 하여 그는 눈을 감았다. 죽음을 앞둔 충신의 비장한 심정이 절절하여 가슴이 사무친다.

4. 죽음 그 이후

성삼문과 그의 아버지 성승이 거열형으로 죽고 난 뒤 동생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 삼형제와 성맹첨 등 다섯 아들은 모조리 교형(목매다는 형)으로 죽였다. 이들 가문의 부녀자들은 관노나 공신들의 사노비로 전락했다. 다만 박씨와 엄씨 가문으로 이미 출가한 두 딸은 화를 피했다고 한다. 특히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계유정난 1등공신이었던 박종우에게 하사되어 노비로 살다가 성종 6년에 석방되었으니 거의 20년 만에 노비에서 풀려난 셈이다.

성삼문이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긴 다음 머리는 3일 동안 시장거리에 매달아두고 나머지 시신은 팔도에 나누어 보내 본보기로 삼게 했다. 시신 중 일부는 생육신 중의 한 분인 김시습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논산시에 성삼문의 묘가 또 있는데 이도 시신 중 한 부분(한쪽 다리)을 그곳에 안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 29화 <박팽년>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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