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7화 단종복위운동


1. 세조를 벨 절호의 기회

세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온 명나라 사신이 태평관에서 머물고 있었다. 세조는 그들을 위해 창덕궁 광연전에서 축하연을 베풀 계획이었다. 세조는 물론이고 상왕인 단종과 세자도 함께 참석하는 연회였다. 경호를 위하여 무장 성승, 유응부, 박쟁을 별운검으로 임명했다.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별운검으로 하여금 연회장에서 일시에 세조와 세자의 목을 베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6월 1일 결전의 그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상황은 계획한 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날씨가 덥고 연회장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더욱이 세자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별운검이 없어졌으니 세조를 벨 기회가 없어졌을 뿐더러 비록 세조를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경복궁에 머물고 있던 세자가 군사를 몰아온다면 거사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성삼문, 박팽년 등은 거사를 미루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사를 연기하면 기밀이 누설될 위험성이 커지는 것은 자명한 일. 그래서 유응부는 계획대로 밀고나가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동원할 군사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다른 대안을 준비해 놓지도 못한 상태에서 혈기만으로 거사를 밀고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성삼문과 박팽년의 주장대로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거사는 뒤로 미루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6월 1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명나라 사신을 위한 축하연은 세조와 상왕만 참석한 채 별운검 없이 진행되었다.

2. 김질(金礩)의 밀고

하루가 지난 6월 2일.
거사가 처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유응부가 우려했던 일이 의외로 빨리 찾아오고 말았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말했고 정창손은 사위와 함께 세조에게 사건의 전모를 고해 바쳤다.
먼저 성삼문을 잡아들여 세조가 친히 추국을 했다. 성삼문은 뜻을 함께한 충신들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혔다. 유응부, 이개, 하위지가 잡혀오고 마지막으로 박팽년이 잡혀왔다. 집에 있던 유성원과 허조는 일이 잘못됨을 직감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혹독한 고문은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 박팽년은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었으니 능지처참형을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능지처참형(대부분 거열형으로 집행했음 – 수레를 이용하여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으로 죽은 자가 세조실록에 기록된 사람만 해도 46명이나 된다. 능지처참형으로 죽은 자는 대개 저자거리에 목을 3일 동안 매달아 두게 하였으니 이런 공포 정치는 조선 역사에서 두 번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거열형을 집행할 때는 군기감 앞 거리(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에 만조백관을 빙 둘러 서게 하여 참관하게 한 뒤에 집행하였으니 그 공포 정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교형(목매달아 죽이는 형벌)과 참형(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으로 죽은 자는 더 많으니 이를 더하면 사형으로 집행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복위운동이 발생한 지 두 달이 지날 무렵 충신들의 원혼이 이승을 떠나기도 전에 세조는 공신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잔치를 벌였다. 적몰한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특히 충신들의 부녀자(어미, 부인, 첩, 딸, 여동생)를 노비로 나누어 가지는 세조의 비정함은 어떤 말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부녀자 173명을 공신들에게 노비로 하사했으니, 충성을 다하다가 죽은 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가솔들의 비참한 삶은 어떠했을까 상상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능지처참(거열형)
능지처참(거열형)


3. 함정 이론

세조가 무력으로 권좌에 오르긴 했지만 권력은 칼의 위력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 민(民)의 힘을 얻지 못해 늘 불안한 상태였다. 단종의 지지 세력은 세조를 늘 불안하게 만들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의 인물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세조는 이들을 발본색원해 일망타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럴 기회나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 제기된 것이 함정 이론이다. 미끼를 던져주어 그 함정으로 저들이 몰려들도록 유도하는 계획이었다.
만일 기획된 음모가 아니라면 성승, 유응부, 박쟁을 별운검으로 임명할 리가 없었다. 반골 성향을 지닌 인물에게 경호를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무사들이 세조의 주위에 넘치고 넘치는데 그들 중 한 명도 별운검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임금의 경호를 이렇게 허술하게 기획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승, 유응부, 박쟁은 단종을 향한 충정심이 강한 인물임을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이들에게 별운검을 맡겼으니 이것이 바로 함정 이론의 첫 번째 근거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의심되는 부분은 축하연을 벌일 당일에 갑작스럽게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하고 세자도 참석하지 않도록 한 점이다.
창덕궁 광연전이 별운검을 세우기에 너무 협소한 장소라면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실의 의전행사가 그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기획되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광연전으로 정했다가 행사가 임박한 시간에 계획을 변경해 버림으로 해서 상대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결과를 유도한 것이다.
별운검 취소는 그들의 변명처럼 협소하기 때문이라고 하자. 그러나 세자의 불참석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축하연은 세조의 즉위 축하연이기도 하지만 세자를 명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첫 인사 자리이기도 했다. 정통성이 없던 세조는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절차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임금이었다. 그런 중요 시점에서 세자를 불참석시킴은 이보다 중요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세자를 세조와 분리하여 둘 필요가 있음이 그 이유였다.
함정이론을 사실대로 믿는다면 단종의 배후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덫에 순진한 충신들이 걸려든 셈이다.


4. 발본색원의 절정

세조는 성삼문과 권자신에게 고문을 하여 단종이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자백 받았다. 그리하여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그 무덤을 파헤쳤으며 단종의 외가는 외숙부 권자신을 비롯하여 멸문지화를 입었다.
이미 죄를 받아 수원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영양위 정종(경혜공주의 남편)을 전라도 광주로 멀리 보내고 경기 삭녕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보냈다.
단종의 배후세력이면서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자는 정종과 금성대군뿐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과연 그들은 세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 28화 <단종복위사건의 주역 - 성삼문>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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