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6화 세조 즉위와 그후


1. 왕위 찬탈의 순간

1455년 윤6월 11일 빈청에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그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단종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인물들을 제거하는 일을 논하는 자리였다. 세종의 6남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단종의 매형이자 경혜공주의 남편인 영양위 정종,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양어머니 역할을 했던 혜빈 양씨, 그리고 그 아들들이 제거 대상의 중심 인물이었다. 수양대군 사람들이 대전으로 나아가 단종을 겁박하는 동안 수양대군은 경회루로 향했다. 넷째동생을 제거하고 아버지 세종의 후궁을 제거하는 자리이며 조카사위를 제거하는 자리였다. 그런 역사적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음이었을까? 수양대군은 대전으로 가지 않고 경회루로 향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서 옥쇄를 받든 성삼문을 앞세우고 단종이 직접 경회루까지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위의 뜻을 전했다.
단종을 경회루로 오도록 만드는 연출은 정말 세조의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대전에서 만조백관을 앞에 두고 양위를 한다면 수양대군은 절대로 왕위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받는다면 역심이요, 그 순간은 곧 역모인 것이다. 비록 임금이 세자에게 양위 선언을 하더라도 세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많아 보아 왔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경회루를 선택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 몇 번을 사양하는 체하다가 수양대군은 선위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 옥쇄를 들고 갔던 성삼문이 대성통곡을 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성삼문의 행동이 불쾌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 순간의 장면을 스냅사진처럼 <연려실기술>은 기록하고 있다.

성삼문이 옥쇄를 들고 경회루로 나아가 내관 전균에게 전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세조가 엎드려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
<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고사본말 편 >

 


모든 건 끝나고 말았다.
수양대군이 곧바로 근정전으로 돌아와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패자는 쓸쓸이 귀양을 떠났다. 그 길은 귀양길이 아니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 바로 저승으로 가는 죽음의 길이었다. 훗날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는 사사되고 영양위 정종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

2. 정통성이 없는 세조

세조의 치명적인 약점은 정통성이 없다는 점이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의 콤플렉스는 재위 14년 동안 내내 그를 괴롭혔다.

세조가 묘호를 조(祖)로 쓴 이유
조(祖)는 창업군주에게만 허용되는 묘호이다. 그래서 이성계에게만 태조라는 묘호를 썼고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등 나머지 왕의 묘호는 모두 종(宗)을 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조는 조를 썼다. 태조와 동일선상의 군주로 올려놓았다. 즉 김종서 등에게 뺏길 뻔한 왕권을 지켜냈으니 나라를 창업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창업이나 마찬가지라면 세조부터 왕조를 다시 시작하는 셈이니 정통성 시비를 줄여보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조는 즉위년 9월에 서둘러 신숙주를 명나라에 보냈다. 명으로부터 즉위 승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3넌 전, 사은사를 자원했던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데리고 명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쌓은 친분과 노하우를 충분히 활용하여 신숙주는 무사히 명으로부터 세조 즉위를 승인받고 귀국했다.

신숙주의 불행
그는 귀국하는 도중에 부인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또한 그의 장남 신주도 함께 귀국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소식을 들은 신주도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22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한꺼번에 부인과 장남을 동시에 사별하는 아픔을 맞보아야만 했다.


신숙주가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명나라 축하사절단이 도착했다. 세조는 명의 사신을 2달 여 동안 극진한 대접을 했다. 명나라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것 역시 정통성이 없는 세조가 할 수 있는 몸부림이었다.

3. 충신들의 반격

6월 1일에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최대의 축하연을 벌일 예정이었다. 이 축하연에는 세조를 포함해 세자와 상왕(단종)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였다.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에는 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내정되었다.
세조를 제거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 충신들이 모여 거사를 계획했다. 축하연에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자는 성승과 유응부뿐이었다. 세조와 세자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세조를 잡더라도 세자를 잡지 못하면 그래서 세자가 궁궐수비대를 몰고 반격하는 경우를 가장 걱정했는데, 세자도 함께 참석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축하연을 코앞에 앞둔 시각.
한명회가 축하연 스케줄을 갑자기 변경했다.
장소가 비좁고 더운 관계로 별운검을 행사장에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포인트는 별운검인데 별운검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없다면 무슨 수로 세조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충신들은 당황했다. 성삼문, 박팽년 등은 거사를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주장하였고, 유응부는 무장답게 쇠뿔도 단김에 뽑자고 주장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 27화 < 단종 복위 운동>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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