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풍수의 대가 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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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풍수의 대가 정인지
  • 정원찬 기자
  • 승인 2019.09.0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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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1화 풍수의 대가 정인지

 

1. 정인지의 양면적 평가

정인지는 집현전 시절부터 세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학문적 능력은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만큼 탁월했다.
뿐만 아니라 풍수, 역법, 역사 등에도 밝았다. 그래서 문종비 현덕왕후, 세종, 문종의 왕릉 조성 사업에 풍수로서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재능을 아껴준 세종, 문종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수양대군 쪽을 선택한 이유는 김종서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3살이나 아래인 정인지는 김종서의 정치적 경쟁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집현전 최고의 엘리트인 정인지는 능력만큼 대우를 받지 못함이 늘 서운했다. 중요 회의에 초대를 받지 못하거나 관직이 요직에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그것을 김종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계유정난 직후 희생된 충신들의 가솔들을 종으로 데려갈 때 정인지는 김종서의 큰며느리(장남 김종서의 처)와 딸 숙희, 딸 내은금을 종으로 데려갔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잠재된 복수심과 인간성을 함께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의 인간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사건은 박팽년에 관한 일화이다. 정인지가 집현전 수장으로 있을 때 박팽년은 집현전의 젊은 엘리트였다. 비록 21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집현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였다. 자식보다 더 사랑했고 아꼈던 인재였다.
그런데 사육신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 세조에게 가장 강하게 저항했다고 하여 정인지는 박팽년의 아내를 종으로 취했다. 김종서의 며느리와 딸들을 종으로 데려가더니 이번에는 박팽년의 아내를 종으로 삼았다. 그는 세조에 대한 충성의 표시를 그렇게 표현하는 인물이었다.
비정한 정인지의 또 다른 모습이다.

또한 상왕으로 물러나 앉은 단종을 사사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이도 정인지였다. 세조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자신이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던 신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의 행동에 정말 수긍이 가지 않는다.

2. 단종의 태실 조성에 관여하다

세종 때 정인지와 이정녕은 함께 풍수학 제조를 역임한 적이 있다. 풍수학 제조는 풍수지리에 관한 실무최고책임자를 말함인데 풍수에 관하여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자에게 내리는 정2품의 관직이다.

이 무렵 경상도 성주에 원손(단종)의 태실을 조성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이정녕이 맡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단종의 태실지 인근에 이정녕의 할아버지 묘가 있었다. 이럴 경우 묘는 반드시 이장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녕은 그 사실을 숨기고 이장을 하지 않았는데 후에 들통이 났다.
관련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정앙(鄭秧)이라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정인지에게 보고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인지가 묘가 태실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무슨 해가 되겠느냐고 하면서 보고를 묵살하였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인지의 이후 행보를 종합해 보건데 그는 단종의 태실이 좋은 곳에 묻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미 좋은 기운을 받고 있는 이정녕 조상의 묘를 그대로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인지는 심문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소위 모르쇠 답변으로 일관했다.
결과는 엉뚱하게도 정인지를 고발한 정앙에게 무고죄를 적용해 벌을 내렸다. 이런 문제로 정인지 같은 인재를 다치게 하거 싶지 않은 세종의 마음이 정인지를 살려낸 것이다.

3. 세종의 왕릉 조성에도 개입하다

정인지는 세종 때 풍수학 제조에 오를 만큼 풍수학에 관한 한 권위자였다. 세종은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에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왕릉을 조성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가장 목소리를 크게 낸 사람은 풍수학에 밝은 수양대군과 정인지였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왕릉 조성을 위한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풍수 최양선이 폭탄선언을 하였다.

“이곳에 묻히면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습니다.”

실로 충격적인 예언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풍수학 제조인 정인지, 이정녕 등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죄로 최양선은 의금부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훗날 세종의 장자인 문종도 요절하고 장손인 단종 역시 요절하면서 장자로 이어지는 혈통은 끊어지고 말았으니 최양선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었다. 더욱이 세조는 장자가 아니니 천수를 누렸다고 하더라도 그의 장자 의경세자도 20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무서운 예언은 모두를 떨게 만들었다.
결국 예종 때에 와서야 세종의 왕릉인 영릉을 지금의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여주 영릉은 그 음덕으로 조선이 5백이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최양선의 예언을 무시하고 헌릉에 세종의 왕릉을 조성한 뒤 가장 득을 본 사람은 수양대군이다. 아버지 태종 곁에 묻히고 싶다는 세종의 효심을 이용해 흉지임을 알면서도 그곳을 왕릉으로 고집한 정인지나 수양대군은 그 덕택으로 대권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수양대군도 장자를 잃는 참사를 피해가진 못했다.

4. 문종의 왕릉 조성에도 개입하다

20화 <문종 현릉에 묻히다> 편에서 다루었듯이 노비 목효지가 단종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쪽지를 올렸다. 즉 헌릉은 주인이 약하고 객이 강하며 산의 기운이 이미 끝난 땅이니 그곳은 왕릉으로 쓸 수 없다는 목효지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왕릉을 조성하던 과정에서 물이 솟는 습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정인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왕릉 선정과 관련하여 정인지는 문종비 현덕왕후, 세종 문종의 세 왕릉 선정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세 왕릉 모두 최악의 흉지를 선택한 셈이다.

5. 부친 정흥인의 묘

정인지는 아버지 정흥인의 묘를 충남 부여군 능산리에 썼다. 그곳은 큰 뱀이 먹이인 개구리를 쫓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먹이가 풍부하도록 아래쪽 입구에 많은 개구리가 헤엄치고 노닐 수 있도록 연못을 조성하여 그 이름을 와영담(蛙泳潭)이라 하였다. 풍부한 먹이를 확보한 아버지의 묘 덕분인지 정인지는 많은 재물을 축적했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인지는 그리하여 윤사로, 윤사윤, 박종우와 함께 당시 조선의 4대 부자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성종 때에 이르러 그는 축재한 부 때문에 탄핵을 받기도 했다.

6. 정인지의 묘

정인지의 무덤은 충북 괴산 외령리에 있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시절 이곳을 지나다가 우연히 잡았다고 한다. 그의 묘는 늙은 쥐가 내려오는 형국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앞산이 고양이산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고양이 앞에 쥐.

정인지 묘(앞산이 고양이 형국) - 위쪽이 부인 묘, 아래쪽이 정인지 묘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하지만 쥐띠인 정인지의 선택은 의외였다. 즉 부귀공명를 누릴 만큼 누린 그가 이제 더 이상 무엇이 필요했겠는가. 그 부귀공명을 온전히 지켜내는 것만이 중요했다. 하여 그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납작 엎드려 보신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처세의 달인다운 선택이었다.

그는 스스로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로 산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자성하면서 후손들에게 3가지 훈계를 남겼다고 한다.

하나, 태평시절이든 난세이든 늘 근신하라.
둘, 세상이 다할 때까지 명당을 지켜라.
셋, 정인지의 자손임을 명심하라.

그러나 천하의 명 풍수였던 그도 결코 화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고양이 앞에서 납작 엎드려 화를 피해 보려 했지만 훗날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에 정인지가 동조했다는 이유로 그의 유골을 파내어 부관참시 하는 형벌을 내렸다.

- 22화 <현덕왕후 마침내 현릉에 묻히다>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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