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의 전순의(2) - 세조의 품에 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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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어의 전순의(2) - 세조의 품에 안기다
  • 정원찬 기자
  • 승인 2019.08.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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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19화 어의 전순의(2) - 세조의 품에 안기다

- 천민 출신이었던 전순의. 그는 문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상한 처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로부터 의관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부를 하사받았다. -


1. 고속 승진

세조가 임금으로 오르자마자 전순의는 원종공신 1등이 되었고 이후 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정3품 당상관 벼슬인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사육신 사건에서 몰수한 충신들의 재산 일부를 하사받기도 한다. 이후 그는 정2품 자헌대부라는 벼슬에까지 올라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누리게 된다. 천민 출신이었던 그가 이 같은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문종의 죽음과 관련한 보은의 차원에서 세조로부터 받은 대우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2. 수상한 행동

수상한 행동은 전순의뿐만 아니었다. 수양대군이나 도승지 강맹경의 행동도 정상이 아니었다. 문종이 승하하기 직전에 급히 나타난 수양대군이 청심원은 왜 처방하지 않았느냐고 어의들을 향해 꾸짖고 있다. 문종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을 수양대군이 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강맹경으로부터 보고 받고 있던 수양대군이라면 차라리 세자를 위로해 주는 장면을 연출함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 수양 대군이 뜰에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청심원을 올리지 않는가?“
하니, 전순의가 비로소 청심원을 올리려고 했으나 시기가 때가 이미 늦었다. 조금 후에 임금이 훙서하였다.
<문종실록 2년 5월 14일>

수상한 행동은 강맹경에게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도승지를 맡고 있는 강맹경은 의관들의 치료 감독을 책임지고 있는 직책이었다. 문종 사후 조정에서 전순의를 살려둘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그만이 전순의를 옹호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문종이 수양대군의 최측근인 강맹경을 도승지로 두고 있었으니 전순의의 이상한 치료 행위가 마음대로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꼴이 된 셈이다.
문종 사망 당시 도승지였던 강맹경은 임금의 치료에 관한 일이라면 의정부에 먼저 보고하고 시행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수양대군에게 먼저 보고하고 뒤에 의정부에 보고했다.
문종을 모시고 활쏘기 대회를 관람한 뒤에 임금을 모시고 환궁해야 하는데 어가만 보내고 그는 수양대군 사저로 가서 뒤풀이 행사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도승지로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일을 그는 서슴지 않고 했다.
문종이 사망하기 열흘 전에는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절에 가서 재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 자리에 강맹경이 동행한 적이 있었다. 조정의 일을 팽개치고 사사로이 수양대군을 수행하고 간 것이다. 대신들이 그 부당함을 조정에 고하자 강맹경이 급기야 환궁하는 일도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승지의 임무를 팽개치고 수양대군의 가신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문종이 사망하던 당일 그의 행동은 더욱 수긍이 가지 않는다. 상황이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종서 등 의정부에 보고하지 않아 문종이 숨을 거두는 그 시간 신료들은 모두 의정부에 있었다. 정보를 차단한 것이다. 고명대신이라도 될까봐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문종은 어떤 고명도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린 세자를 두고 숨을 거두는 마당에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단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 횡포가 더욱 심하였다. 단종실록 즉위년 6월 8일 기록에 의하면 정사를 임금에게 논할 때 사관이 듣지 못하도록 강맹경이 사관을 밖에 나가 있게 했다. 항상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조정의 큰 의논을 얻어듣지 못했다고 사관은 실록에 그 불만을 남기기도 했다.

3. 독살설의 부정

「역사저널 그날」에서 신병주 교수는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없고, 본인의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에 따른 결과라고 주장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 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승하하여 다시 삼년상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여 그 후유증으로 종기가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덧붙이길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 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학자로서 정말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삼일장 장례를 치러본 경험담을 빗대어 문종의 사망 원인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부모 장례를 치른 뒤 체력 저하와 스트레스 심화로 3년 만에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후유증은 올 수 있어도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조선 임금들 중에서도 문종과 비슷하게 상을 치른 임금들도 많지만 그것으로 인해 죽은 경우는 없었다. 만약 후유증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전의감에서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KBS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
<KBS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

4. 억울한 죽음

전순의의 이해할 수 없는 처방으로 문종은 제대로 손도 써 보지도 못하고 급사하고 말았다. 임금이 노환으로 병사하더라도 어의는 형벌을 피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전순의의 경우에는 삼족을 멸하고도 남을 죄였다.
그런 어의를 세조는 중용하여 의관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넘어 자헌대부(정2품)에까지 벼슬을 오르게 하였다.
그렇다면 강맹경은 어느 정도의 선물을 받았을까?
세조가 강맹경에게 베푼 배려의 정도를 보면 그가 이룬 공로를 간접적으로 추정해 낼 수 있다.
세조에게 최고의 1등공신에는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한명회, 사육신의 역모를 고발하여 세조의 목숨을 구한 정창손, 세조의 정치적 브레인 신숙주, 이 셋을 꼽는 데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새조 4년 관직 개편을 보면 영의정 정창손, 좌의정 강맹경, 우의정 신숙주, 병조판서 한명회 순이었다.
정창손은 사육신 사건의 고변자여서 예우 차원에서 등용했다가 1년 뒤 물러나게 하고 그 자리에 강맹경이 올랐다. 신숙주, 한명회를 따돌리고 영의정에 오른 것이다.
한명회나 신숙주보다 서열이 높다는 것은 그들보다 더 큰 공을 세웠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들보다 더 큰 공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단연 문종의 죽음과 관련한 것이다.
문종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을 때 대궐은 알지모르지간에 수양대군의 힘에 의해 조정되고 있었다. 종기 치료는 전순의에 의해 조정되고 있었고, 그를 조정한 인물은 강맹경이었으며 그는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김종서 등 의정부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문종은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 20화 <문종 현릉에 묻히다>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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