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16화 문종(1) - 준비된 왕
- 문종은 준비된 왕이었다. 세종 아래에서 29년간이나 왕자 수업을 받았고 세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맡아 국사를 다스린 세월이 8년이었다. 그러나 재위 2년 2개월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1. 탁월한 능력

문종은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 시절 그러니까 태종14년(1414) 10월 3일에 태어나서 8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조선5대 임금으로 등극하기까지 무려 29년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왕 수업을 받았고 세종이 죽기 전까지 8년간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사를 처리할 정도로 완벽히 준비된 왕이었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말수가 적으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늘 검소하였으며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고 학문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종 후반기의 업적은 사실상 문종이 이루어낸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능력은 탁월한 것이었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에서 문종의 탁월한 능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종이 세자를 앉혀 놓고 말씀히시길
"학문 깊이도 나보다 뛰어나서 내가 추진했던 사업들 모두 네가 마무리를 했어. 병법과 군사 분야에선 그야말로 천재나 다름없지. 4군 6진을 포함해 북방을 정비했고, 화차 같은 신병기도 직접 설계하지 않았니? 그런 세자에 비하면 수양은 꼭 고양이 앞에 쥐처럼 보여. 외모도 관우처럼 생긴 너에게 비교할 바가 못 되지.“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p30에서 따옴

또한 문종의 필체는 동생 안평대군에 버금갈 정도로 달필이었다.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는 그가 집필한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문종의 필체에 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문종의 글씨는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진기한 기운이 있어 진(晉) 나라 사람의 오묘한 경지를 능가하였다. 그러나 돌에 새긴 두서너 가지만이 세상에 전할 뿐 지극히 보배롭고 신비한 글씨는 참으로 필적을 보기 드무니 애석하다.』

2. 문종의 효심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문종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여러 가지 정무가 많아도 늘 부왕의 약을 먼저 맛보고 수라상을 친히 살폈다고 한다. 또 밤중이 되어도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 물러가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감히 물러가지 않았다.
세종이 앵두를 즐기므로, 문종이 일찍이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익으면 따다가 바쳤는데 세종이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겠느냐.” 하였다.
지금도 온 궁 안 나무가 모두 앵두나무인 것도 이때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문종의 외모

문종은 아주 잘생긴 호남형의 인물이었다. 세자 시절에 명나라 사신들이 그 외모에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세자를 두고 사신이 말하기를,
“복스러운 기품이 전하와 같다. 우리 조정에서 만약 세자의 장대함이 이와 같은 줄을 알면 어찌 세자에 봉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세종실록 5년 4월 6일>

▶ 사신이 세자 대우하기를 매우 공손히 하고 칭찬하여 말하되,
“이 나라는 산수가 빼어나다더니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나는군요.”
하였다.
<세종실록 7년 윤7월 19일>

▶ 문종의 얼굴이 아름답고 수염이 매우 길어, 웅위(雄偉)한 모습이 범상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제5권 문종조 고사본말 문종편>

4. 문종의 어진

임금의 얼굴을 그린 어진은 임진왜란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문종이 관우를 닮았다고 하는 호남형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어진에 관한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어 문종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덧붙인 글 1] 문종의 어진
신익성(申翊聖)이 병자호란 뒤에 임금의 모습이 그려진 족자 하나를 얻었는데, 조정에서는 모두 인종의 어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익성은 그 용안의 수염이 길게 그려졌다는 말을 듣고 혼자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후에 표구할 때 묵은 배접을 벗겨 내고 보니, 그 뒷면에 문종의 어진이란 글자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모습에 수염이 매우 인상적이고 잘생긴 얼굴로써 문종의 어진이라고 추증했던 신익성의 탁견은 실로 놀랄 만하다.
<연려실기술> 문종조 고사단말 편

5. 탁월한 군사 전문가

오늘날의 다연발 로켓에 해당하는 화차를 만드는데 직접 관여하고 그 활용 방법에 대해서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4군6진의 개척에도 참여하였고 특히 진법(陣法) 운영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흔히 문종은 병약하고 나약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종기를 앓기 전까지만 해도 삼국지의 관우를 연상하리만큼 무인다운 기골을 지닌 인물이었다. 활솜씨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군사 부분에서 세종도 인정할 만큼 탁월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다.

실물처럼 재현한 문종의 화차
실물처럼 재현한 문종의 화차

▶ 이동식 미사일 화차
문종의 화차는 실로 대단하다. 오늘날에 비유한다면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레는 지름이 87㎝인 바퀴 2개 되어 있으며 평소에는 2명이 끌 수 있도록 고안되었고 험지나 오르막길에서는 4명이 끌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문종 화차는 크게 두 가지 우수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발사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화차 아래쪽에 작은 기둥을 세우고 그 밑에 바퀴를 부착시킴으로써 발사 각도를 최대 45˚까지 높여 사정거리를 최대로 늘일 수 있었다. 또한 총통기를 이용할 경우 100발까지 발사할 수 있어 적에게 선제타격을 하여 적의 사기를 제압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종 1년(1451)에 문종이 직접 창안한 화차(火車)는 두 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총통기(銃筒機)나 신기전기(神機箭機) 중 하나를 올려놓고 발사하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무기이다. 세계 역사상 왕이 직접 발명하여 대량으로 제작 사용한 무기로써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화차는 1451년에만 모두 700대 이상이 제작되어 전국의 해안과 성문 앞에 배치되었다.

[덧붙인 글 2] 문종과 신숙주의 논쟁
신숙주와 문종의 대화
“궐내에 화차를 만드는 공장이 너무 많으니, 청컨대 없애주소서.”
"군기를 수련하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니, 그만둘 수 없노라.“
“바야흐로 중국과 군사를 연합하고 있으므로, 아직 어떤 군사도 압록강을 침범한 적이 없습니다. 하여 지금은 지키는 시대이니 마땅히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을 앞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준비가 있으면 우환이 없으니 빨리 준비해 두고자 함이니라.”
“우리나라는 사면이 적의 침입을 받을 땅이니, 그 대비는 마땅합니다. 하오나 어찌 성상께옵서 직접 나서신단 말씀입니까?”
“그러면, 나라를 위하여서 한 가지 일도 하지 않기를 바라는가?”
“아닙니다. 큰 것은 잃고, 작은 이로움만 보고서 하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일이 어찌 작은 이로움이라고 말하는가? 큰 이로움을 주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
하면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문종실록 1년 6월 9일>

문종의 확고한 신념에 비해 신숙주의 논지는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차를 제작하는 공장을 궐내에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가 무기를 제작하는 일로 민심을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화제를 둘러댈 뿐만 아니라, 유비무환은 필요하나 임금이 작은 이로움에 연연하여 직접 나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종이 추진하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에 밀려, 자꾸만 논지를 옮겨가며 말하는 신숙주의 품새가 영락없는 변명처럼 보인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대학자인 신숙주의 견해가 얼마나 옹졸하며 문종의 안목이 얼마나 넓은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17화 <문종(2) - 억울한 죽음>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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