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14화 경혜공주(3) – 고난의 길

- 향덕방에 신혼 살림살림을 차린 지 2년 남짓. 경혜공주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동생 단종, 검은 속내를 드러낸 수양대군이 단종마저 죽이더니 기어이 남편마저 능지처참시켰다. -

1. 유배길

남편이 수원으로 다시 유배를 떠나는 날, 경혜공주는 기어이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따라갔다. 그것이 경혜공주가 선택한 세조에 대한 유일한 저항 방법이었다.
세조는 경기 관찰사에 명하여 매월 식량을 공급해 주었지만 그것은 여론을 의식한 제스처에 불과했다. 수원으로 유배를 보낸 뒤 성록대부 직위마저 거두어버렸다.
그러더니 강화에 있던 경혜공주의 집과 토지를 몰수하여 세종의 서자 의창군에게 하사해 버렸고, 양주(揚州)에 있던 집과 토지는 신숙주에게, 배천의 집과 토지 및 광주(廣州)의 집과 토지는 내시 전균에게 하사해 버렸다.

세조 2년에는 그 유명한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수원에 유배 중이었던 경혜공주가 무얼 할 수 있었겠냐만 세조는 이 사건에 정종을 엮어 더 먼 곳인 전라도 광주로  쫓아버렸다. 나머지 남아 있던 토지마저 모조리 몰수하여 한명회에게 하사해 버렸다.

2. 단종과 금성대군의 죽음

경혜공주는 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다.
정미수(鄭眉壽).
눈썹이 하얗게 될 때까지 오래 살라는 의미로 세조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정미수의 신원마저 회복해 주지 않고 세조가 죽은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닌 듯하다.
천금보다 더 값지게 얻은 아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어둠이 찾아왔다.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또 꾀하다가 탄로나 사사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영월 청령포에 격리되어 있던 단종마저 사사되었다는 부음을 들어야만 했다.
이제 경혜공주에겐 아무런 희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공주 부부는 성탄 스님이 기거하는 암자에서 동생의 명복을 빌었다. 성탄 스님으로부터 듣는 설법이 유일한 낙이었다.

한편 세조에겐 마지막 제거 대상, 오직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바로 영양위 정종이었다.
세조는 성탄과 정종을 역모로 엮어 능지처참이란 죄목으로 죽였다. 그때 아들 미수의 나이가 6살이었다.
정종을 한양으로 압송하여 국문을 했다.
우승지 홍응(洪應)이 의금부에 가서 정종을 국문하며 앞으로 할 바를 물었다. 그러자 정종은 대답하길

“빨리 성상(단종)의 은혜를 입고자 할 뿐이며,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였다.

단종의 곁으로 가서 충성을 바치고자 하니 빨리 죽여 달라고 했다. 충신다운 모습을 죽을 때까지 잃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정종을 능지처참시킨 후 역모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시신을 조각내 팔도에 내려 보내 교훈으로 삼게 했다. 엽기적 살인이 아닐 수 없다.​

경혜공주의 묘(소재지:고양시 덕양구)
경혜공주의 묘(소재지:고양시 덕양구)

3. 공주 순천 관노가 되다

남편이 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했으니 공주의 신분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세조는 공주 작위를 박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경혜공주를 순천의 관노로 쫓아버렸다.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없지만 <연려실기술> <월정집> 등에 전하는 걸 보면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연려실기술>을 인용해 보자.

정종이 유배지에 있다가 역모로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의자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를 씌워 귀양을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여자신은 끝내 공주에게 사역을 시키지 못하였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정난에 죽은 여러 신하 편>

남편 정종이 역모에 엮이어 죽임을 당할 무렵 경혜공주는 미수의 동생을 잉태하고 있었다. 만삭의 몸이 되어 순천의 관노로 살아간다는 것은 공주에겐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딸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그녀의 모습은 경외롭기까지 하다.

- 15화 <경혜공주(4) - 죽음>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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