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13화 경혜공주(2) 깨어진 꿈

- 향덕방에 신혼 살림살림을 차린 지  2년 남짓. 경혜공주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동생 단종, 검은 속내를 드러낸 수양대군이 단종마저 죽이더니 기어이 남편마저 능지처참시켰다. -


1. 차라리 꿈이고 싶어라

문종의 갑작스런 죽음.
어린 동생이 보위에 올랐다. 의지할 곳 없는 단종은 향덕방 누이의 집을 자주 찾곤 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그날도 단종은 누이의 집에서 자고 싶다며 향덕방 경혜공주의 집으로 행차했다. 1010일 늦가을 밤. 많은 충신들을 수양대군이 죽인 그날 밤, 경혜공주 내외는 동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의지할 데라곤 김종서와 안평대군뿐인데 그들마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수양대군이 언제 동생을 그들처럼 죽일지 몰랐다.

하여 아뢸 겨를도 없이 형세가 위급하여 수괴 김종서 부자를 먼저 베었습니다.”
뭐라구요? 김종서 대감을 베었다구요? 전하의 어명도 없이?”
경혜공주는 주먹을 옹송그려 쥐었다. 촛불에 흔들린 그녀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에 가까웠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나이다. 하오니 그 나머지 잔당들도 모두 토벌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김종서를 베었다면 전하마저 안전하지 못할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경혜공주는 생각했다.
내일 편전에서 밝히겠다는 전하의 말씀 못 들으셨는지요?”
아니 되옵니다. 내일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나이다. 조정 신료를 당장 불러주십시오. 전하.”
수양 대군의 목소리는 협박에 가까웠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p156에서 인용

동생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면 경혜공주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원수나 다름없는 수양 숙부에게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속마음을 숨긴 채 아부했다. 그래서 공주 내외는 수양대군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비 50명과 집 한 채를 수양대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문종 때에 안평대군이 노비(奴婢) 50구와 집 한 채를 주었는데, 안평대군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죄인이 소유했던 재물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종실록 11019>


안평대군이 강화에서 사사되던 다음 날.
경혜공주는 자기를 친딸처럼 사랑해 주시던 안평 숙부마저 버려야만 했다. 죄인으로 몰아 그로부터 받은 재물은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며 재물을 수양대군에게 바쳤다. 그것이 동생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번에는 충신 정효전(鄭孝全)의 역모를 수양대군에게 밀고했다.
정효전은 태종의 사위인데 수양대군을 모해하려 무리를 만들고 있다고 밀고했다. 안평숙부의 처남들이 모두 매형인 안평대군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수양대군의 편에 붙을 때, 안평대군의 4촌 처남이면서도 끝내 등을 돌리지 않은 사람이 정효전이었다.
정효전을 밀고하고 안평대군과 거리두기를 해서라도 수양대군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 밀고의 대가로 영양위 정종은 성록대부(1) 관직을 선물 받았다. 노비 10명과 많은 토지도 덤으로 받았다.
그러나 정효전 일가는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2. 함께 갈 수 없는 길

경혜공주 내외가 수양대군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사이 수양대군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 준비된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단종 3년 봄.
수양대군의 제거 대상 리스트에는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와 그 아들들, 그리고 영양위 정종이 들어있었다.
혜빈 양씨는 세종의 서자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세 왕자를 둔 후궁이었다. 세종은 일찍이 경혜공주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죽자 경혜공주와 단종의 양육을 혜빈 양씨에게 명했다. 혜빈은 경혜공주 남매를 극진히 보살폈다. 특히 어머니 품을 모르고 자란 단종은 할머니인 혜빈 양씨의 품에서 잠들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세종의 사후에도 출궁하지 않고 문종과 단종을 보필했다. 단종이 즉위한 후에도 혜빈 양씨가 단종 옆에서 왕실의 안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수양대군에서는 눈엣가시 같았다. 그래서 혜빈 양씨와 세 아들은 수양대군에게 제거 대상 1순위에 올랐고, 결국 유배를 보냈다가 사사해 버렸다.
금성대군을 죽인 죄목은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금성 대군이 무사들과 은밀히 결탁하고 혜빈 양씨, 상궁 박씨와도 은밀히 왕래하였습니다. 또 한남군(혜빈의 장남영풍군(혜빈의 3)은 그들과 결탁하여 문종조 때부터 궁내에서 마구 권세를 부려와 그 불법한 일은 이루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또 정종이 혜빈과 금성 대군을 은밀히 섬겨온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며, 조유례도 역시 그들의 일당입니다. 청컨대 조속히 그 죄를 밝히고 바로 잡으소서.”
<세조실록 1년 윤611>

역모로 몰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없는 죄목이다.
현대사에서도 정적을 제거할 때 부정축재 등으로 엮어 제거하곤 하는데, 이런 방법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듯하다.

또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중벌을 받은 사람으로 상궁 박씨와 조유례가 눈에 뜨인다.
박씨는 문종이 생전에 데리고 있던 상궁이었는데 단종의 지밀상궁으로 붙여준 인물이다. 따라서 문종 사후에도 그녀는 비록 상궁의 지위였지만 혜빈 양씨와 함께 단종의 큰 울타리가 되어준 인물이었다. 그래서 죽임을 당했다.
또한 조유례는 경혜공주가 어린 시절 궁 밖으로 피접 나갔을 때 돌봐준 수양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이도 함께 제거되었다.

수양대군이 이들을 한꺼번에 엮어서 제거하려 하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영양위 정종은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동생이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지만 그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아무도 곁에 없는데 누가 상왕을 지켜줄 것인가.
경혜공주는 병으로 앓아누웠다.
그런 공주를 두고 조정에서는 정종을 돌아오게 하려는 꾀병이라고 떠들어댔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공주가 병을 내게 고해 왔는데, 그 의중이 아마도 정종을 돌아오게 하려는 것 같다.“
<세조실록 1년 윤617>

동생이 고립무원이 되고 남편은 귀양을 갔는데, 그래서 앓아누웠는데 세조는 그걸 두고 꾀병이라고 했다.
세조 재위시절, 경혜공주 남매와 관련한 일이라면 백성들의 민심은 늘 남매의 편에 있었다. 정통성이 없는 세조로선 그 민심이 늘 부담이었다. 그래서 두 달도 못되어 영양위 정종을 유배지에서 돌아오게 하였다.
공주가 병석에서 일어나자 이번에는 종친에서 들고 일어났다. 공주의 병이 나았으니 정종을 다시 유배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친이라고 해야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권력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뜻을 달리하는 종친들은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으니 양영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계양군 등이 중심이었다. 무력으로 권력을 잡긴 했지만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으니 종친에게조차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왕권은 유지할 수 없을 처지였다.
특히 양영대군은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뺏겼으니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혈통에 절대로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노년에 수양대군 편이 되어 권력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양영대군과 계양군이 영양위 정종을 다시 귀양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결국 백성들의 바람을 저버리고 수양대군은 정종을 다시 수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KBS <역사저널 그날> 장면 중에서

남편이 유배를 다시 떠나는 날, 경혜공주는 기어이 남편을 따라 수원 유배지로 따라가 버렸다.
그것이 경혜공주가 선택한 세조에 대한 유일한 저항 방법이었다.


- 14<경혜공주(3) - 고난의 길>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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