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12화 경혜공주(1) - 운명

-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써 단종의 누이이기도 하다. 문종이 재위 3년만인 39세에 승하하였는데 경혜공주도 문종이 살았던 그 나이(39)만큼만 살고 죽었다. -
 

1. 경혜공주,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들다

경혜공주(敬惠公主)는 세종 18년에 세자(훗날 문종)의 후궁이었던 권씨에게서 태어났다.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가 후사 없이 궁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세종으로서는 새 세자빈을 세워 왕손을 빨리 생산해 줄 세자빈이 필요했다. 그때 후궁 권씨는 이미 슬하에 딸(훗날 경혜공주)을 두고 있었으므로 후궁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결국 경혜공주는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어머니 현덕왕후는 공주가 6살이 되던 해 동생 단종을 출산하고 하루 만에 숨을 거둔다. 그래서 공주는 어린 시절, 판관(判官)을 지낸 조유례(趙由禮)의 집에 피접을 나가 살았다. 어린 왕손에게 액을 피하게 하기 위해  덕이 많은 대신을 골라 그의 집으로 피접살이를 시키곤 했다.
조유례는 경혜공주를 돌봐준 공덕으로 문종 1년에 중추원부사까지 벼슬이 올랐는데 훗날 수양대군이 그를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시켜 죽였으니 그 역시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다.

문종은 다른 왕자에 비해 외모면에서도 상당한 상남자였고, 현덕왕후도 후궁 시절 어떤 여인보다 문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으니 그런 부모에서 태어난 공주 또한 상당한 미모를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경혜공주의 아름다운 미모는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 경혜공주 역을 맡은 홍수현
KBS 역사저널 그날. 경혜공주 역을 맡은 홍수현

딸 바보 문종만큼이나 세종도 경혜공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대개의 공주는 10살 전후로 혼인을 하여 성인이 되면 출궁하게 되는데 경혜공주는 15살이 될 때까지 혼인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고 자라서 더 오래 궁에 두고 싶은 마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손녀딸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런 마음이 세종의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경혜공주 14살이던 해 늦가을부터 세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다. 그러자 세종은 서둘러 손녀딸의 혼사를 진행했다.

2. 꿈 같이 만난 그대

경혜공주의 배필 영양위 정종(鄭悰)은 형조참판을 지낸 정충경의 아들이다. 그의 고모는 일찍이 효령대군(세종의 형)의 부인이 되었고, 누이는 영응대군(문종의 막내동생)의 부인이 되었다. 정종의 가문에서 두 명이나 왕실의 대군에게 출가한 명문 집안이었다.
세종은 혼례를 치르기 전에 미리 정종에게 순의대부(順義大夫, 2) 관직을 제수하고 그해 1, 공주의 나이 열다섯에 혼례를 치렀다.
그러나 혼례의 기쁨도 잠시.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종은 숨을 거두었다.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베푼 마지막 선물이었다. 혼례 전에 죽기라도 한다면 공주의 혼례가 3년 더 미루어져야 할 터인데
세종은 그래서 혼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3. 문종의 즉위와 경혜공주의 출궁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딸을 위해 대궐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덕방(陽德坊, 현재 종로구 가회동 일대)에 신혼집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민가 30여 채가 헐리는 큰 공사였다. 조정 신료들은 철거민들의 원망과 백성들의 노역을 이유로 공사를 반대했다. 대신 다른 곳의 민가를 매입해서 집을 개조하자는 쪽으로 건의를 했다.
그러자 문종의 주장은 단호했다.
도성 안은 민가가 조밀하여 진실로 빈 땅이 없는데, 그렇다면 왕자·왕녀가 성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문종은 딸 바보답게 많은 반대에서 무릅쓰고 기어이 공사를 진행시켰다.
공주가 혼인을 하면 곧바로 궁궐을 떠난 것이 아니고, 몇 년 더 살다가 성년인 16살쯤에 궁궐 밖으로 나가서 남편과 함께 살았다. 공주가  혼인을 하면 시댁으로 들어가지 않고 왕실에서 별도로 살림집을 장만해줬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살림집은 50칸 이내로 규정하고 있다. 집을 새로 짓거나 다른 사람의 집을 매입해서 수리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 공사로 인해 헐린 민가의 집이 40여 채였다고 실록에는 기록하고 있다.

[덧붙인 글]  현주, 군주, 옹주, 공주의 차이

왕가의 딸에 대한 호칭은 조선이 개국된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명칭을 사용하다가 세종 때에 와서 거의 정비되었다.

공주
임금의 딸 중에서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즉 왕의 적녀에게 붙이는 호칭

: 경혜공주

옹주
임금의 후궁에서 태어난 딸, 즉 왕의 서녀에게 부르는 호칭
: 덕혜옹주


군주
세자와 세자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즉 세자의 적녀에게 부르는 호칭으로 후에 세자가 임금이 되면 공주로 승격된다. 또한 대군의 정실에서 태어난 딸도 군주라 부른다.


현주
세자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딸, 즉 세자의 서녀에게 부르는 호칭으로 후에 세자가 임금이 되면 옹주로 승격된다.


기타
여러 군의 정실의 딸과 대군의 아들의 딸은 향주(鄕主)라 칭하고, 그 나머지 종실의 딸은 모두 정주(亭主)라 칭한다.


품계

공주와 옹주는 왕비, 대비처럼 품계가 없는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한 왕실의 최상위 계층에 속한다. 공주와 옹주는 남편의 직책에 따라 경제적 녹봉과 토지를 받는데, 남편이 죽어도 살아 있을 당시의 남편 직책에 맞는 대접을 받는다.
거기에 비해 현주는 정3, 군주는 정2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대우와 녹봉을 받는다.

4. 경혜공주의 호칭

문종은 일찍이 세자 시절, 세자빈 김씨와 혼인하였는데 자녀가 없이 이혼하였다. 그리고 봉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는데 봉씨도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쫓겨나고 말았다. 그때 후궁이었던 권씨에게 딸 경혜공주가 있었는데 그때는 어머니가 후궁이었으니 현주였다. 현주 앞에 고을 이름을 넣어 OO현주라고 부르게 되는데 무슨 현주라고 불렸는지 사료에는 남아 있지 않다.
세자빈 김씨, 봉씨에 이어 후궁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하게 되자 그 딸은 군주가 된다. 현주나 군주는 지역 이름을 군주, 현주 앞에 붙여 부르게 되는데 따라서 강원도 평창군의 지명을 따서 평창군주라 불렀다.
세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조선 6대 임금으로 오르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문종이다. 따라서 평창군주는 아버지 문종이 임금이 되니 신분이 상승하여 공주가 되었다. 지역명칭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현주, 군주와는 달리 공주가 되면 지역 이름으로 이름을 짓지 않고 예쁜 이름을 사용한다. 따라서 경혜라는 이름을 지어 경혜공주라 불렀다.
따라서 현주, 군주, 공주를 모두 거친 경우는 경혜공주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 13< 경혜공주(2) - 깨어진 꿈 > 편이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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