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10화 세종대왕자 태실과 단종의 태실
- 왕실에서 왕손이 태어나면 아기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기록된 태지석과 태반, 탯줄을 태항아리에 담아 좋은 장소에 안장하였는데, 이는 태어난 왕손의 건강과 앞날의 무궁한 번성을 기원하기 위함이었다. -

1. 태실을 만드는 과정

태항아리(작은 항아리에 태를 담아 큰 항아리에 넣는다)
태항아리(작은 항아리에 태를 담아 큰 항아리에 넣는다)

왕손이 태어나면 지방 관찰사들에게 명당을 찾아 올리라는 장계를 보낸다. 후보지로 선택되면 관상감에서는 지관을 보내 조사한 뒤 태실지를 결정한다.
한편 산실청에선 왕손이 태어나자마자 미리 준비해 둔 백자항아리에 태를 넣어 산실 방 안 지정된 위치에 보관했다가 길일을 받아 태를 깨끗이 씻는 의식을 거치게 된다. 이때 의녀는 태를 깨끗한 물로 100번을 씻은 다음 향기로운 술에 담갔다가 백자항아리로 옮겨 담는다.
기름종이로 태항아리 입구를 덮고, 그 위에 다시 비단으로 덮은 다음 빨간 끈으로 단단히 묶는다. 다음에는 더 큰 항아리(외호) 바닥에 솜을 깔고, 거기에 태를 담은 속 항아리를 넣는다. 이때 바깥 항아리의 빈 공간을 솜으로 가득 채워 안쪽 항아리가 움직임에 파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 밀봉한다. 마지막으로 빨간 끈으로 항아리의 사면을 단단히 묶고 현지로 옮겨 태실을 조성하면 모든 과정이 마무리된다.

2. 세종 아들들의 태실

왕릉은 도읍지에서 100리 안팎에서 조성되었지만 태실은 전국의 명당을 찾아 각지에 조성되었다.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념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다. 그래서 태실이 조성되는 지방은 군()으로 승격시키고, 세금과 노역을 덜어주는 혜택까지 주어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런데 세종은 그런 이점에 비해 백성들에게 끼치는 민폐가 더 많다고 보았다. 그것은 애민정신이었다. 그래서 4년간의 공사 끝에 그의 아들 17(왕이 될 세자는 제외)의 태실을 성주 선석산 한 곳에 모두 모았다. 그곳이 지금의 성주 세종대왕자태실(국가사적 제444)이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은 맏아들 문종을 뺀 열일곱 왕자와 손자인 단종 태실을 합쳐 모두 열여덟 개라야 옳은데, 실제로는 열아홉 개다. ‘()’이라고 이름만 적힌 표석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다.
나중에 손자(단종) 태어나자 세종은 그 태를 성주에 묻으라고 명했다. 그때 명을 받은 사람은 태종의 서녀 숙혜옹주의 남편인 이정녕이었다. 세종에겐 고모부에 해당하는 인척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태실 가까운 곳에 이정녕의 조상 무덤이 있었다. 이정녕은 조상 묘가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태실 바로 옆에 이정녕의 조상 묘가 있다는 사실을 또 알고 있었던 사람은 지관 정앙(鄭秧)이라는 사람이었다. 정앙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니 정앙은 의외의 자백을 했다

내가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이장경(李長庚)의 묘를 이장할 것인가 아닌가를 의논했는데 정인지가 하는 말이 거리가 대단히 머니 해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정인지의 말에 따랐습니다.” <세종실록 2613>

정인지를 잡아다가 국문해야 한다고 태실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 세종에게 고하였지만 세종은 정인지의 편이 되어 국문도 해 보지 않고 정인지 혐의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해 버린다.
후에 정인지는 문종 편에 서지 않고 수양대군 편에 섰다. 계유정난의 지지세력 중 으뜸에 해당하는 인물이 되었다. 세조가 집권한 뒤 단종의 태실을 없애버리게 되는데,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 중에 한 명이 바로 정인지였다. 집현전 출신의 인재여서 세종이 아끼던 인물이었지만, 태실과 관련하여 그때 정인지에게 죄를 물었다면 훗날 사랑하던 손자 단종이 배신당하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훗날 보고 누락 사실이 발각되자, 세종은 즉각 조상 묘의 이장을 명했고, 이정녕은 벌을 면치 못했다.

 

세종대왕자태실(성주)
세종대왕자태실(성주)

3. 단종의 태실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종의 아들들과 함께 묻혀 있던 단종의 태실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은 정인지와 다툼이 있었던 지관 정앙(鄭秧)이었다. 그가 올린 상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왕세자의 태실이 여러 대군들의 태실 옆에 흙을 덧붙여 기울게 조성한 곳이니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길지(吉地)를 전국에 널리 구하여 옮기게 하소서.”
<문종실록 즉위년 98>


즉 세종은 여러 왕자들 밑에 손자를 둠으로써 숙부들이 어린 조카를 잘 보살펴 주리라 소망하는 의미에서 태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 단종이 여러 숙부의 태실 아래 묻혀 있기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눌려 지내는 모양새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문종은 아들의 태실을 선석산에서 가야산 자락인 법림산으로(현재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일대) 옮겨 버렸는데 이것마저 세조는 집권 후에 찾아내어 없애버렸다.

- 11<단종 태실의 미스터리>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이전 글 읽기 링크
오피니언>칼럼>

저작권자 © 티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