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의 역사 이야기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5화 계유정난 – 수양대군과 그의 사람들

1. 수양대군과 그의 자녀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르게 되지만 정통성이 없는 그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위 14년 동안 끊임없이 많은 정적을 죽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옥좌 뒤에 숨겨진 그의 삶은 불행하기 그지없었다. 노년에는 피부병으로 고생을 했으며 그것으로 숨을 거두었다. 가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긁어 덧난 피부는 늘 고름이 흘러 방안엔 악취로 가득 찰 정도였다. 

. 그러나 그보다 더 그를 괴롭힌 건 세자의 죽음이었다. 20살에 장남 의경세자가 요절할 즈음에는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특히 문종 비 현덕왕후가 꿈에 자주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서 비롯한 악몽이었다.
 수양대군은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단종복위 사건과 관련지어 현덕왕후를 폐위시켜 신분을 서인으로 격하해 버렸다. 수양대군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형수인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바다에 버리기까지 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차남 해양대군이 예종이 되어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14개월 만에 죽으니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장남 의경세자가 죽은 그 나이에 죽었다. 두 아들이 모두 20살에 죽었으니 차남의 요절을 보지 않고 죽은 것이 그나마 세조가 누린 복이었다.
 손자들도 단명했다.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이 35세, 차남 자을산군(성종)이 38세,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이 3세에 죽었다.

2. 한명회와 그의 딸

한명회는 과거와는 인연이 없어 늘 낙방하였고 38세가 되어서야 겨우 경덕궁 궁지기를 하였다. 그는 절친한 벗이었던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의 책사가 되어 계유정난을 주도하였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케 하는데 기여하여 정난공신이 되었다. 죽을 때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으며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권력을 확고하게 하였다.

 그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첫째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아들인 윤반과 혼인하였다.
 둘째딸은 신숙주의 장남 신주와 혼인하였는데, 신주가 22살 되던 해 아버지 신숙주를 따라 명나라 사행 길에 놀랐다가 귀국 중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객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한명회의 차녀는 청상과부나 다름없이 평생을 혼자 살았다.
 셋째딸은 16살 되던 해 11살인 예종과 혼인하였으나 이듬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17살에 사망하였다. 인성대군마저 세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때의 장면을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어서 오시게, 사돈. 그래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네.”
 세조는 한명회를 일으켜 마련된 술상 앞으로 끌었다.
“소신이 전하께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변변치 못한 자식 때문에 성심을 흩뜨린 죄 너무 크나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이보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네. 술이 이 슬픔을 온전히 잊게 해 주겠느냐마는 그래도 한잔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걸세.”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p184에서 따옴


 넷째딸은 자을산군(훗날 성종)과 혼인하였으나 자녀 없이 19살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자을산군이 임금이 된 후에 공혜왕후로 추존되었다.
부모의 업보를 자식이 물려받은 점은 세조나 한명회나 공통적이다. 그들의 자식들 대부분은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고통을 그들은 평생동안 짊어지고 살았을 것이다.
 한명회는 73살까지 장수하였으나 죽음 후에는 비참했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에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하여 죄를 물어 관직을 추탈당하고 부관참시(무덤 속의 시신을 파내어 다시 목을 자르는 형벌) 당했다. 그의 목은 잘려 한양 저자 거리에 매달리는 형벌도 추가되었다.

 3.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 그리고 안평대군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세종 시절에는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중국을 13차례나 다녀오는 등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자기를 사랑해 주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수양대군에게 붙었으니 그를 두고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할 수밖에 없었다. 변절은 그렇다 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신숙주의 인간성을 잘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진다.
 계유정난 직후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조완규(안평대군의 수하)의 아내 소사(召史)와 딸 요문(要文)을 신숙주에게 하사품으로 주었는데 소사와 요문이 우물에 투신하여 죽어버렸다. 뒤에 단종복위사건과 관련하여 공신들에게 노비를 내리는 잔치를 또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신숙주가 폐위된 단종비 정순왕후를 자기 집 종으로 달라고 세조에게 요구하였다. 조선 중후기 역사서인 김택영의 <한사경>이나 윤근수의 <월정만필> 그리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이 내용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마냥 헛 이야기는 아닌 듯싶다.
 학문적 역량이 높기로 알려진 신숙주가 그를 키워주고 아껴준 임금으로부터 충절을 꺾고 변절자로 돌아선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때 조선국 왕비였던 정순왕후를 종으로 달라고 요구하는 배짱은 어떻게 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 6화 <세종의 며느리 욕심 (1) - 문종과 세자빈> 편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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