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의 역사 이야기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의 역사 이야기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문종마저 갑자기 승하하자 단종이 의지할 곳은 오직 누이인 경혜공주밖에 없었다. 그레서  외로울 때면 가끔 누이인 경혜공주의 처소에 행차하여 자고 가곤 했었다. 10월 10일 밤, 그날도 단종은 경혜공주의 처소에 있었다. 그곳은 경복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덕방(현재의 계동 가회동 일대)에 있었다.
늦가을의 밤이 깊어갈  무렵.
오누이가 마주 앉아 정담이 무르익을 만한 그 시간.
수양대군이 느닷없이 갑옷을 입고 시어소(임금의 임시 숙소)에 나타났다.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 뒤 곧장 경혜공주의 처소로 달려온 것이다. 그는 느닷없이 김종서의 역모를 고변했다.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함께 역모를 일으켰으니 조정 대신들을 긴급 소집해야 한다고 단종을 윽박질렀다.

12.12가 일어나던 그날 밤과도 똑 같았다.
국방장관은 오리무중인데 보안살령관이 정승화 체포 결재를 얻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로 들이닥친 그 모습. 어쩌면 수양대군이 단종을 겁박하는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단종을 겁박하던 당시의 상황을 <연려실기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때 승지 최항이 문을 열고 나와서 맞이하므로 수양대군이 그와 손을 잡고 같이 들어갔다. 임금이 놀라 일어나며 "삼촌, 나를 살려주세요"했다. 수양대군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이 처리하겠습니다" 하고는 곧 명패(命牌)를 내어 여러 재신(宰臣)들을 불러들였다. (중략)
수양대군은 군사를 세 겹으로 짜 세워서 세 겹의 문을 만들었다. 한명회는 생살부를 가지고 문의 안쪽 편에 앉았다. 여러 재신이 단종의 부름을 받고 들어오는데, 첫째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들을 떼고, 둘째 문에 들어와 그 이름이 살부에 실렸으면 홍윤성, 구치관 등이 쇠몽둥이를 들고 때려 죽였다.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람을 보내 윤처공 등을 죽이고 민신을 현릉(顯陵-문종의 능) 비석소(碑石所)에서 죽였다. 『연려실기술』단종조고사본말 편

결국 어명을 빙자하여 한밤에 수양대군은 대신들 모두를 입궐케 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재상이 들어오면 시중을 드는 종을 제거하고 혼자 들어오도록 하라.”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함귀, 박막동, 수산 등이 제3문을 지키고 있다가 입궐하던 병조판서 조극관,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을 철퇴로 때려 죽였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많은 사람이 제3문을 통과하여 죽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 제3문에서 철퇴를 맞은 사람은 3명밖에 없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입궐을 하지 못한 대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윤처공, 이명민, 조번, 원구, 김연 등은 집으로 군사를 보내어 죽였다. 하물며 현릉(문종 묘)에서 비석 공사 감독을 하고 있던 이조판서 민신은 현장으로 군사를 보내어 죽였다. 함께 있던 아들 다섯도 거기서 모두 참살되었다.

이렇게 보면 살생부는 단순히 제거하고자 하는 자의 명부가 아니라 사전에 완벽하게 계획된 살해 시나리오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입궐하는 경우의 시나리오, 입궐하지 못하는 경우의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이조판서 민신의 경우처럼 공사 현장에 있던 대신들의 처리 방법까지 사전에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난이 일어난 다음날 김종서 부자, 황보인, 조극관, 이양, 윤처공, 이명민, 조번, 원구는 이미 주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저자거리로 끌고 나와 다시 한 번 목매달아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

또한 함길도도절제사 이징옥, 경성부사 이경유, 평안도도관찰사 조수량, 충청도도관찰사 안완경 등 많은 충신들이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한 달 안에 모두 처형되었다.
그리고 계유정난으로 처형된 자들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16세가 넘은 아들이 있으면 목매다는 형벌로 죽였으며, 부녀자들은 공신들에게 노비로 하사하였다. 16살이 되지 못한 아들은 어미의 곁에 두었다가 16살이 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섬 지역의 관노로 보내 격리시켜 버렸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은 그 가족을 포함하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덧붙인 글1] 이징옥의 난

두만강을 정리할 목표를 세운 세종은 신뢰하는 신하 김종서를 함길도로 보내었다. 이징옥은 김종서가 무예와는 일절 관련이 없는 유학자였기에 처음에는 무슨 도움이 되겠냐면서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김종서가 강단과 충성심으로 가득 찬 훌륭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종서도 이징옥의 진가를 인정하면서 두 인물은 형제와도 같은 사이가 되었다. 이후 이징옥은 김종서의 지휘 아래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경원, 종성, 회령, 경흥, 온성, 부령)을 설치하는 일을 도왔다.

시간이 지나, 이징옥은 함길도 절제사의 자리에 오르는 등 널리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명장이 되었다. 그런데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국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종서와 절친한 사이였던 이징옥은 곧 수양대군 세력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이징옥을 제거하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 자리에 박호문(세종 시절에 김종서를 모함했던 인물이기도 하다)을 임명하고 이징옥을 한양을 불러들인다.

한양으로 오는 도중 이징옥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낌새를 눈치 챈 이징옥은 다시 함길도로 돌아가 박호문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 사건을 이징옥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징옥의 난은 세조에 의해 왕조실록이 왜곡되어서 그렇지 불의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의거하고 주장하기도 한다. 충절을 굽히지 않은 사육신처럼 이징옥 장군도 모반을 일으킨 역도가 아니라 임금(단종)을 지키려는 충신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호원 작가가 쓴 장편소설 ‘물망’ 참조)

조정에서는 수양대군을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로 삼아 토벌군을 꾸렸다. 또한 이징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우면 포상하겠다고 각지에 알리고, 여진족에게도 반란군에 동조하면 함께 토벌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렸다. 하지만 토벌군이 출정하기도 전에 이징옥의 심복 수하인 이행검 등이 배신하여 이징옥과 그의 세 아들을 살해해 버렸다. 죽은 이징옥에게 시신을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형을 더하였으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졌다.

[덧붙인 글2]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와 계양군 이증(李璔)

신빈 김씨는 세종 때 궁중의 여종으로 들어왔다. 13살이 되던 해에 세종 비 원경왕후에게 발탁되어 중궁전 나인이 되었다. 소헌왕후는 그녀를 신임하여 후에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
당시 중궁전 출입이 잦던 세종. 나인 김씨는 세종의 눈에 들게 되고 결국 성은까지 입어 후궁이 되었으며 슬하에 8남매를 둘 정도로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신빈 김씨의 큰아들로 태어난 계양군은 비록 왕자이긴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여 수양대군의 수족 노릇을 하며 살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 수양대군의 사주를 받아 안평대군이 역모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상소를 조정에 올린 바도 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계유정난 뒤 1등 좌익공신이 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도움으로 권력을 얻은 그는 늘 주색에 빠져 살다가 38살에 사망했다.

- 5화 계유정난 <수양대군과 그의 사람들>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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