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따라 역사 따라♣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의 역사 이야기

이 코너에서 연재할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2화 계유정난 – 안평대군을 잡아라(1)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문종, 수양대군에 이어 세종의 셋째아들로 태어 났다. 그는 서예, 시문,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수양대군 주변 인물이 무인들이 많았다면  그의 주변에는 문인들이 많았다. 특히 그의 서체는 탁월하여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탄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이 권력에 대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들어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운명은 달라졌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은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그래서 수양대군으로선 결코 살려둘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밤.
안평대군을 잡기 위해 수양대군의 수하들이 그의 집을 쳐들어갔을 땐 그는 집에 없었다. 밤새 도성을 뒤졌지만 안평대군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김종서가 철퇴를 여러 번 맞고도 아직 살아있다는 정보만으로도 수양대군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게다가 안평대군 행방마저도 오리무중이니 그는 좌불안석이었다.

사실 안평대군은 양어머니 집에 있었다. 안평대군은 일찍이 숙부인 성녕대군의 양자로 들어 갔는데 양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도 양어머니 집에서 자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양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할어버지 태종은 양영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세종), 성녕대군 네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성녕대군은 태종의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성녕대군은 창녕성씨와 혼인하였으나 혼인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4살이던 해에 홍역에 걸려 죽었다. 애지중지하던 성녕대군의 갑작스런 죽음은 태종에게 큰 슬픔이었다. 그래서 죽은 성녕대군을 위해 손자 중에서 가장 똑똑한 손자를 골라 양자라도 들여 주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종에게서 난 똑똑한 손자들이 많으니 그 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세종의 아들들은 모두 양자로 들어가길 원했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는 즐거움을 떠나 종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순서로 본다면 당연히 둘째인 수양대군 차례였다. 그러나 태종은 거친 수양대군보다 다재다능한 안평대군에게 마음을 두었다.

뒷날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유지를 받들어 수양대군을 버리고 안평대군을 동생인 성녕대군의 양자로 선택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충격이었다. 태종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부왕인 세종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서글펐을지 모른다. 동생 안평대군에 대한 열등의식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이 결국 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게 되는데 그 원인이 안평대군에 대한 열등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안평대군이 양어머니 댁에서 묵었던 그날 밤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의 수하들은 안평대군이 늘 머무는 무계정사를 덮쳤지만 그곳에 없었다. 밤새 안평대군의 찾으려 도성을 뒤지던 병사들은 날이 샌 뒤에야 성녕대군 군부인 댁에서 안평대군을 체포할 수 있었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곧바로 강화도에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불안했던지 교동도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사했다. 불과 이레 만에 죽인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

그가 죽은 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죄목 25가지를 열거하여 발표했다. 그 중에 세 번째 죄목이 양어머니 성씨를 간통했다는 죄목이었다. 양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신 안평대군을 두고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밤 양어머니 집에서 잤다는 이유만으로 간통죄를 씌웠다. 그것은 동생에 대해 잠재해 있던 열등의식이 안평대군을 빨리 죽이게 된 한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글1] 안평대군의 후사

부인 영일정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차남 이우량은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10개월 전에 병사했고 장남 이우직은 안평대군이 사사되고 난 1년 뒤 교형(목매달아 죽이는 형벌)으로 죽였고, 외동딸과 며느리는 계유정난 1등공신 권람에게 노비로 하사되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제수와 조카딸인데 이들을 자기가 수족처럼 부리던 권람의 집 노비로 팽개치는 비정한 수양대군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덧글2] 부인 영일정씨와의 불화

안평대군 나이 12살 되던 해에 이미 죽은 병조 판서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그때 정씨의 나이 9살이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둘 만큼 화목했다. 그러나 문종이 죽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대립이 심화될 무렵 처가의 대부분이 수양대군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것을 안 이후부터 부부의 금슬은 깨어졌다. 단종실록에 1년 4월 23일자 기사에 부부의 금슬이 깨진 지 7, 8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안평 대군의 부인 정씨가 졸(卒)하니, 쌀·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백 권과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다. 정씨는 졸한 병조 판서 정연(鄭淵)의 딸인데, 안평대군이 박대하여 서로 보지 아니한 지가 이미 7, 8년이었다. -

사실 안평대군의 맏동서는 신숙주(申淑舟)의 형 신중주(申仲舟)이고, 둘째 동서 권담(權聃)은 계유정난의 1등공신인 권람(權擥)과는 4촌간이다. 동서의 배후 인물들이 모두 수양대군의 최측근 사람이다.
부인 정씨는 계유정난 5개월 전에 죽었는데 그때 안평대군뿐만 아니라 장남 이우직도 장례에 참석치 않았다. 안평대군이 아내의 죽음에 눈을 돌린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외면했다. 그만큼 원수지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로 미루어 보아 이 무렵에는 두 집안이 원수보다 더한 관계로 악화된 상태임을 짐작케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안평대군의 처남 네 명은 계유정난 때 모두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1등공신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공신은커녕 한 번도 연일정씨 형제들을 높은 벼슬에 올려주지 않았다.

- 3화 계유정난 <안평대군을 잡아라(2)>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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