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개인택시 권종섭 기사

내가 택시기사가 되기까지는 3번의 커다란 비극이 있었다. 어려운 시절 태어나 너무나 큰 시련을 겪었고 지금 개인택시기사가 되기까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슬픈 사연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1952년 10월 전남 순천시 월등면 계월리 깊은 산골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4년 음력 5월5일 단오날 시골에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우리 집도 모내기로 바빴으며 모친께서는 음식 장만을 하느라 5살짜리 막내 여동생이 졸졸 따라다니는 줄도 모르실 정도였다. 그날 모친이 우물가에 가서 음식을 씻고 왔는데 여동생이 우물에 빠져 생명을 빼앗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 뒤로 모친은 무당이 되려고 신을 받기 시작했고 미친 사람처럼 40일간 밥도 안 먹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다. 가정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결국 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지인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간 뒤로 가정은 안정돼 정상을 되찾고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 됐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하고 싶어도 장학생이 아니면 학교에 가지 못했다.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마침 사촌형님이 정비공장에서 자동차 수리를 하는 기술자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기술을 배웠으며 정비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야간에는 정비를, 주간에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며 열심히 생활했다.

1975년 6월 정비사 자격시험에 응시해 정비사 2급자격증을 취득하게 됐다. 그 이후 10월 운전면허시험에도 응시해 당당하게 운전면허증과 정비사 자격증이라는 두 날개를 달게 됐다. 그러다보니 나를 서로 데려가겠다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나는 안정된 직업을 찾기 위해 금성택시(주) 정비사로 취업했다. 그러나 운전기술은 정비를 하면서 자동으로 배웠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욱 실력이 뛰어났다. 어느 날 추운 겨울 부장님께서 ‘기사가 오늘 무슨 일이 있어 못나온다고 하니 임금을 벌어 오라’고 해서 운전을 해보게 됐다. 그런데 정비보다는 훨씬 편하고 행복한 것이 아닌가. 정비는 추운 겨울에 쇠를 만져야 하기 때문에 손이 시려 힘들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정비사자격증과 운전면허증을 둘 다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 있었다.

나는 1978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 그곳에서 항공촬영을 하며 측량을 해 사우디 지도를 만들어내는 일을 했다. 사우디 전 지역을 이동하며 작업을 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많았다. 1980년 6월 귀국해 다시 택시회사에 입사해 돈을 많이 벌어서 정비공장을 차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을 하면서 시골에 있는 여동생을 동대문여상으로 전학시켜 공부를 시켰다. 그런데 비극이 또 발생했다. 같은 해 10월 나는 아버님 생신이라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동생에게 ‘연탄가스 조심하라’는 편지를 남기고 시골에 내려갔다. 이튿날 시골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동생이 연탄가스로 숨을 거뒀다는 비보가 들렸다. 믿기지 않았다. 부모님 뵐 면목도 없었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했지만 다시 힘을 내고 일어나 양재동 우면산 계곡 옆에서 양돈 500두를 길러 출하했지만 사료를 먹여 기르기 때문에 타산이 맞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8년 수해를 당해 돼지와 집이 다 떠내려갔다. 나는 땅을 치고 통곡했다.

앞서 1981년도 해외취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개인택시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해 때문에 개인택시를 양도해 빚 청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나는 일반택시회사인 중동실업에 취업해 12년간 근무했다.

2001년 3월 다시 개인택시를 양수한 나는 지금까지 개인택시 사업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원래 꿈이었던 자동차 정비공장 운영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개인택시를 하면서 선교하고 봉사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나는 택시를 운전하면서 손님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택시기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세상을 더욱 밝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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