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은수

▲ 임은수 작가

조금 늦은 듯싶게 벚꽃이며 목련이 한꺼번에 피어대더니 벌써 바람에 꽃잎이 흩날린다. 꽃이 지면 잎이 자라고 열매도 맺을 테니 너무 섭섭해 할 일은 아니다. 지난해 슬쩍 맛보았던 농사일에 풋사랑처럼 빠진 내가 얼마나 기다리던 봄이었나.

작년에 스무 평 남짓한 밭뙈기를 일궈 주말마다 농사를 짓다가 잠시 농한기에 든 나는, 하루가 텅 빈 것처럼 알 수 없는 허전감에 하루 빨리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옛날 내 고향 어른들은 농한기라고해서 마냥 손 놓고 지내지는 않으셨다. 틈이 나는 대로 짚으로 새끼를 꼬기도 하고 자리나 방석을 엮으셨는데, 나 역시 올 농사를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새해 벽두부터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수시로 농사 계획을 세우곤 했다.

심고 싶은 농작물을 정해놓고, 심을 시기와 수확할 때를 인터넷에서 찾아 월별로 적는다. 상추나 고추 등 기본 작물에서부터 시작해, 가장 늦게 심을 양파까지 스무 가지가 넘는다. 봄이 오면 점점 그 수효가 늘어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예측이다. 주말 농장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이것저것 모종이나 씨앗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무 배추를 비롯한 일반적인 채소부터 구절초나 민들레 같은 야생초까지, 특히 몸에 좋다는 작물은 어찌 그리 많은지 당귀나 고들빼기 포기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구하기 어렵다는 고수풀의 씨앗까지 얻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 가까운 사람이 오래 전부터 농사일을 해 와서 모르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로 물어본다. 그도 역시 처음에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얻어졌을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 준다. 그럴 때마다 한 15년쯤 전에 경기도 파주에서 주말 농사를 지었던 때가 떠오른다.

한 모임에서 파주가 고향인 사람으로부터 선친께 물려받은 밭이 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세 부부가 함께 주말농장을 해보자고 의기투합(意氣投合)해, 겁도 없이 농사일에 덤벼들었다. 서울 상계동에서 파주까지 가는 시간만 해도 거의 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남자들은 사회에서 한창 바쁘게 활동할 시기여서 주말마다 농사지으러 간다는 게 쉬운 처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에 우리들은 참으로 열심히 파주에 다녔다.

5월쯤이었을까. 조금 늦게 시작된 우리들의 첫 농사일은 땅을 파고 이랑을 만드는 일이었다. 여섯 사람 모두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직접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도 일손이 서투르기는 매한가지였다. 흙을 파서 엎고 두둑을 만드는 일이 여간 만만하질 않았다. 서로 높거니 낮거니 의견이 나뉘다가도, 그게 또 그렇게 우습다고 한바탕 껄껄대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웃음은 그해가을 배추를 심고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밭고랑에만 서면 그냥 웃음이 났다. 씨앗 크기보다 10배도 넘는 흙덩이를 들어 올리고 뾰조록이 얼굴을 내민 새싹이 “어쩌면 이리 예쁘냐!”고 웃고, 옮겨 심은 모종이 뿌리 내려서 잘 자라는 게 신통해서 웃었다. 가늘고 긴 시금치 떡잎을 보고 “저기, 저 코스모스 같은 거는 뭐냐?”고 물어서 허리가 끊어지게 웃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 심어 놓은 콩을 까치가 파먹은 것까지 재미있기만 하였다. 그때만 해도 좀 더 젊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웃을 수 있었나 보다. 어쩌면 흙을 만지다보니 마음에 쌓였던 삶의 무게들이 저절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지 우리가 그곳에 가면 동네 어른들이 한두 분씩 밭둑에 나와서 일손이 서툰 우리에게 훈수를 두셨다. 밭둑에 서 있는 감나무의 푸른 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하얀 은발이 보기 좋게 반짝이던 안노인들이다. 밭이 동네 초입에 있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동네 어른들께는 우리의 등장이 작은 관심사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이고! 고추를 그렇게 비게(배게) 심으면 위로만 커서 고추 안 열려!”
“자네들은 무슨 재미가 그렇게 좋아서 맨날 웃는 겐가!”
“저어기, 우리 밭에 가서 상추 뜯어 가. 상추 포기가 배추포기 같아. 저렇게 잘 컸어도 언놈 하나 먹을 놈이 있어야지.”

젊은이들이 떠난 마을에는 붉고 푸른 상추가 탐스럽게 자라서 꽃구름처럼 밭을 덮고 있어도 뜯어다 먹을 사람이 별로 없던가 보았다. 부지런한 어른들이 작은 공간만 있어도 땅을 놀리지 않고 무어라도 심으니, 상추 같은 푸성귀는 집집마다 흔하기도 하였다. 어쩌다가 한 주라도 거르고 가는 날이면 어느새 어른들께서 나오셔서 이런저런 얘기로 반갑게 맞아주시곤 했다.

“지난주에는 왜 안 왔나. 저어짝에 열린 호박은 좀 늙었것다. 조기, 조오짝에 열린 거는 오늘 따 가면 먹기 좋을 게야.”
어른들은 넝쿨 속에 숨어 자라는 애호박 하나라도 눈여겨 두셨다가 우리에게 일러주시곤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언제나 정답게 맞아주시던 그분들이 있어 우리들의 파주행이 더 즐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밭에서 자라는 푸른 것들을 생각하면 자꾸 궁금하고 보고 싶어진다. 첫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보고 싶고 궁금할 거나. 저 늙는 줄 모르고 곗돈 탈 날만 기다린다더니, 밭에 가고 싶어 못 견디게 기다리던 이 봄! 웃음을 심듯이 씨앗을 뿌리고 잘 가꾸다보면 그 옛날처럼 저들이 나를 하냥 웃게 하겠지?


작가 임 은 수
서울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시집 ‘수하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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