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택시기사가 되었나

서울개인택시 임한일 기사

내가 택시기사가 된 것은 우연히 택시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생활고 탓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일을 하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설비공사를 하시는 형님 가게에서 일을 돕다가 문득 나도 영업용 택시를 한번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영등포에 있는 승진택시에 입사해 5년6개월간 근무를 했다. 그러다 노란 제복을 입은 개인택시기사가 부러워서 나도 한 번 꼭 해보고 싶은 생각에 3년 이상 무사고운전 후 1996년 6월13일 드디어 개인택시면허를 취득하게 됐다.
나는 1957년 9월 가을날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고향 변산반도 부안군 보안면 산림리에서 태어났다. 시골에서 초등·중학교를 마치고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청계천에 있는 가내공업사 형광등 안전기를 만드는 곳에 취업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라디오·텔레비전 등 기물 학원에 다니며 생활해왔다.
군입대를 마치고 형 소개로 강원도 태백의 광산에서 일을 하게 됐다. 3개월 정도 근무하게 된 이곳 광산은 선산부와 후산부로 나눠 있는데 선산부에서는 탄광을 채석하고 발파를 했으며 후산부에서는 운반작업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욱한 연기 속에 ‘꽝’하는 소리와 함께 막상이 무너져 내린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순간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다. 그때 예전 안전교육 시간에 ‘탄광 내에서는 동발이 양쪽으로 받히고 있으니 기둥 옆으로 피하면 살 수 있다’고 한 것이 생각나 가까스로 몸을 피해 삶의 기적을 이뤄냈다. 눈을 떠보니 앞에 있던 선산부에 한 사람만 남았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이후 우연한 기회로 사우디아라비아 해외 파견근무 시험에 합격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하고 2년 뒤인 1990년 3월 귀국했다. 해외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집으로부터 불운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국땅에서 한해 두 형제를 잃었다. 바로 위의 형은 광산에서 근무하던 중 광산 붕괴사고로 사망했고 여동생은 지병으로 사망했다. 나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슬프고 괴로웠다. 그러나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처럼 항상 순종하며 살기로 했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러다 마포구 연남동 기사식당골목에서 동생과 자취를 하게 됐다. 나는 동생의 대학공부를 위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원에 다녔다. 나는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했으며 그 결과 동생을 대학 경영학과에 수석으로 합격시킬 수 있었고 그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재 동생은 신한은행 장안평 지점장이 됐다.
1990년 초에는 건설경기가 활성화되기도 했지만 영업용 택시도 영업이 잘 되는 편이었다. 그때는 이제 막 결혼을 한 신혼이었기에 열심히, 정말 성실하게 일해 왔다. 택시를 하다보면 수많은 손님을 모시게 되는데 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고 다니며 듣고 손님들과 대화 나누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됐다.
또 교통방송 통신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오디션을 통과해 지금까지 약 13년간 방송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4월25일에는 본부장 표창도 받았다.
지금까지 18년 무사고운전을 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해주는 아내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생전 우리 아버지께서는 “택시는 안전운전도 중요하지만 남들이 외면하는 장애우와 임산부 등 노약자를 먼저 탑승시켜야 복 받고 산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잊지 않고 지금도 장애우 봉사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손님은 항상 왕이라는 생각으로 승객이 탑승하면 “안녕하세요, 목적지가 어디신지요”, “제 차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되세요”라고 말한다. 그럼 손님은 “기사님도 안전운행하시고 건강하세요”라고 하신다.
서울의 작은 미소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 같다. 가끔 외국손님을 모실 때도 있는데 그분들은 먼저 인사하고 택시를 탄다. 서로 문화 차이는 있겠지만 고마움 속에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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