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자 숙>

우리집 거실에 있는 장식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파이프’가 진열되어 있다. 남편이 담배를 무척 즐기며 피우던 30대 때, 해외에서 온 친구로부터 파이프 한 세트를 선물 받은 것이 그 계기다. 파이프를 반들반들하게 닦아주는 융단수건, 그 속을 청소하는 섬세한 도구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파이프 책자까지 들어있다.

세월이 가면서 본인이 사거나 친지들로부터 받은 것이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쉽게 컬렉션으로 이어졌다. 남편은 제각각 얼굴이 다른, 수집된 파이프를 마치 친구와 악수하듯 만지고 닦아주더니, 어느 날 거울 앞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워보는 연습 끝에 차츰 궐련 피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궐련을 피울 때 남편이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는 그 모습이 왠지 멋스럽게 보였다. 그는 겨울철에 특히 파이프를 즐겨 피우곤 했다. 파이프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엄지로 담배를 꾹꾹 누른 후 불을 붙이고는 조심스럽게 연기를 내뿜는다. 또한 입을 오므리고 담배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하늘을 향해 날리기도 한다. 남편은 아마 서부영화에서 파이프를 피우는 멋있는 배우를 상상하며 흉내 내는 것이 아닐까.

사실 나는 남편이 담배 피는 모습을 싫어한 적이 많았다. 특히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 꽁초가 손가락 사이에 있는 모습은 왠지 초조해 보이거나 궁색해 보여서이다. 그런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서 있으면 위엄이 있고 자신감과 여유까지 보여서 훨씬 남자다워 보였다. 또한 파이프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따뜻하고 정감 있게 느껴졌다.

영국에 여행 갔을때 나는 런던에서 바바리코트를 구입할 계획이었으나 그 비용으로 파이프를 사고 말았다. 아마도 은은한 파이프의 좋은 향과 그 즈음에 읽었던 서경윤의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파이프를 부부생활에 비유한 글귀가 늘 귓가에서 맴돌았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궐련쯤으로 생각한느 것 같다. 자기가 필요한 때에만 피우고 그냥 훌쩍 버리기만 한다거나, 배우자를 자신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불이 꺼져 사랑이 식어버린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다시 그것에 불을 붙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부’가 되면 계속 정성을 다해서 서로 다듬고 손질하면서 사랑의 불을 지펴야 한다”는 내용이다.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것이 때로는 짜증나게 신경이 많이 쓰이고 번거로운 때도 있다. 하지만 귀찮게 여기지 않고 서로에게 정성을 쏟을 때에는 사랑을 가꾸는 재미가 생기므로, 이때만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부부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향기를 풍길 뿐 아니라 보기에도 무척 좋아 보인다.

나는 ‘파이프’를 보기만 하면 부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서로 소중히 여기며 닦아주고 길들이면서 아껴주는 부부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파이프를 선물했던 그 친구는 금년에도 우리 집을 다녀갔다. 지금도 한국에 오면 어김없이 중학생 때 등산부였던 동창들과 북한산과 도봉산을 오른다. 그리고 갈비집인 조선옥과 곰탕집 하동관을 빠짐없이 찾는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언제나 똑같이 형이니 아우니 하면서 싸운다. 꽁초담배를 주워 피우고 입담배를 말아 피우던 시절에 있었던 서열 싸움으로 이어져, 끝내난 제수씨니 형수씨를 발설하고서야 끝을 낸다.

나는 ‘파이프’ 선물을 한 친구가 농담으로 ‘제수씨’라고 부르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는 우리 부부가 파이프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평생 관심을 쏟아 준 형님 같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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