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 헌 렬

때 이른 한파가 12월 초에 찾아왔다.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기상 이변 때문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폭설을 동반해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나니 대비하지 못한 우리는 당황하며 벌벌 떨었다. 폭설로 빙판길 도로가 마비되어 지하철은 북새통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이를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호된 추위에도 손을 꼭 잡고 눈길을 다정하게 걷는 연인들, 운동장이나 거리로 나와 신나게 눈싸움을 하고 재잘거리며 노는 동네아이들, 찬 손을 비비며 포장마차에 들러 뜨거운 오뎅 국물을 마시며 몸을 데우는 사람들. 또 물고기가 물때를 만난 듯이 온통 하얀 은색으로 뒤덮인 대관령에 스키를 타러 가는 젊은이들은 환호성을 부른다.

나도 하얗게 쌓인 눈이 보고 싶어 토요일 오전 우면산에 올랐다. 10cm 남짓 쌓인 눈은 산길을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정말 장관 그대로다. 나무들은 가지가지마다 설화를 연출하며 신비스런 모습으로 나보란 듯이 뽐내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가지에 붙은 빨강, 노랑의 단풍잎으로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던 이파리들, 그들도 다 떨어져 앙상한 몸체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이 계절마다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연출은 기막히게 잘도 한다.

자연은 계절마다 가지에 옷을 갈아입히며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이며 우리 마음을 넉넉하고 따뜻하게 해주기도 하고, 힐링도 시켜주면서 행복감을 전해준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자연은 부모가 자식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풀 듯이, 우리에게 조건 없는 물질적인 혜택과 정신적인 사랑을 베푸니 그 무한한 고마움에 우리는 고개 떨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에게 좋게 일한 게 없다. 오히려 나무를 마음대로 베지 않나, 산을 망가뜨려 토지를 전용해 논밭을 만들거나 신도시를 건설하기도 하고, 화석연료나 금속광물과 같은 천연자원을 마구 파헤쳐 이용해왔다. 그리고 이용 후에는 자연으로 내다 버렸다. 대표적으로 엄청나게 버린 물질이 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이산화탄소이다. 이산화탄소가 대기중에 점점 축적되어 기후를 변화시켜 이변을 만든다. 그에 따라 지구촌에서 발생한 자연재앙이 인명을 앗아가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 채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나라의 경우 게릴라성 폭우를 몰고 온 2002년 태풍 ‘루사’가 그랬고 연이어 2003년에도 한반도에 상륙한 ‘매미’도 그랬었다.

다음 날 부산에서 집안의 혼사가 있어 친척 형님과 서울역으로 향했다. 56년 만에 가장 추운 ‘초겨울 한파’가 기습한 날이다. 영하 13도의 바람에 살갗이 계속 부딪치니 뺨이 시리고 귀가 얼얼해왔다. 12월 초순, 한대 전선 제트기류가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쑥 내려오며 찬 공기를 남하시켜 최저기온이 열흘 동안 네 번이나 영하 10도 아래로 뚝 떨어진 한파였다.

일행은 시간에 별로 쫓기지 않는 일정이라 옛 선로를 달리는 느린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갖는 여행이었다. 열차가 1시간 남짓 달렸을까, 차창 밖을 보니 드넓게 펼쳐진 논밭에도, 저쪽 산에도 온통 흰 눈으로 덮혀 있다. 이렇게 먼지 한 점 없는 깨끗한 세상을 보니 마음까지 저절로 깨끗해지고 머리가 맑아져 온다. 또한 추운 계절에 삭막하고 생명이 정지된 듯한 들판과 산에, 때 이르게 내린 흰 눈으로 하얗게 물들여졌다. 이런 느낌은 겨울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별미이다. 바로 이런 게 우리를 힐링시켜 주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올해 매스컴에서는 힐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힐링이라는 단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회자되었다. 지난여름 런던 올림픽이 열렸을 때는 우리 모두가 ‘힐링’ 열풍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때 런던에서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 13, 은메달 7, 동메달 7개 등 모두 스물 일곱 개를 회득하며 세계 5위로 우뚝 섰다. 이 얼마나 장하고 자랑스러운 쾌거요 영광이던가! 올림픽 경기가 계속되는 내내 우리 선수들이 전해온 메달 소식과 열 세 번이나 태극기가 휘날리며 애국가가 전 세계로 울려 퍼지는 장면을 보면서 국민들을 기쁨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이러한 환호와 즐거움은 그 동안 우리 사회에 쌓인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갈등과 반목을 말끔히 씻어내고 우리 모두를 힐링시켜 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이 바로 힐링이다.

요즈음 혼탁한 선거과정을 거친 대통령 선거도 힐링과정을 거치며 국민의 축제로서 승화되길 염원해본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참여해 유종의 미를 거둔 선거 축제가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또 극복해 하나로 되면서, 사회에서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겐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고, 또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에 벌어진 양극화현상이 사라져 밝고 맑은 사회로 거듭나길 다 함께 염원하면서…….


2012.12.18.

 


박헌렬

프랑스 파리6대학교 공학박사
국제힐빙학회 회장, 중앙대학교 교수
순수문학으로 등단
수필동인지 <두 자연의 하모니>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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